그래서 엄마처럼 살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셨군요
'청소년집단상담시간' 엄마얘기로 격앙되는 나의 맘을 읽은 것인지, 곰곰이 팀장님이 고개를 살짝 내리면서 잔잔한 목소리로 그랬다.
'맞아요', 엄청난 인정이라도 받은 것처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눈이 무서운 엄마를 닮은 나
지금도 아흔을 바라보는 엄마는 '난 한평생 남 부끄러운 짓은 안 했다' 모든 대화의 마지막 결론이다. 그것이 엄마가 가진 최고의 자긍심인 것이다.
성실하지 않음으로 속을 꽤나 썩인 아버지를 그리 원망하며 속상해하시던 엄마였지만 '너희 아버지는 그래도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어'라고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몇 가지 안 되는 긍정적 평가이다.
'남의 눈이 무서버서'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시는 막걸리 한잔 같이 못 마시고, 아버지랑 같이 걸음도 걷지 않으셨다. 지금도
"엄마 병원 갈 때 택시 타셔요"
"야야, 사지 멀쩡한 내가 택시 타면 남 흉본다"
나의 차분했던 목소리는 다시 흥분한다.
지금도 곱게 모시적삼을 손질해서 입는 걸 좋아하시는 엄마. 농사짓는 시골집이었지만 반짝이며 줄 맞추어 걸려있던 양은냄비들. 까만 가마솥은 들기름으로 닦아놓아 늘 반들거리며 고소한 냄새가 났다.
술 드신 아버지의 주먹에 구멍 난 장롱은 한지를 붙여 니스칠로 표 나지 않게 마무리를 해 놓곤 하셨다. 그 장롱문을 두 손으로 열면, 군대 내무실보다 더 각 맞춘 색깔 고운 이불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지금도 난 어릴 때 배운 이불 개는 방식으로 이불 정리를 한다.
'절대 절대! 엄마 닮지 말아야지!' 했는데 난 어쩔 수 없이 가르마까지 '똑 닮은 엄마의 붕어빵'이다.
엄마의 인정이 필요했어.
기억 속 엄마는 날 칭찬하지 않았다.
학업 우수상을 받아와도, 그림을 그려 상을 받아와도, 글짓기를 잘해도... 나의 상장은 차곡차곡 쌓여갔지만 엄마의 표정은 아무런 요동이 없었다. 70년대는 6.25만 되면 '반공 웅변대회'를 했다. "~ ~ 이 연사 강력하게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웅변을 해서 상을 탔다. 그래도 엄마의 칭찬은 듣지 못했다.
국민학교 4.5학년 방학이면 몇몇 아이들을 모아 정해진 책들을 단체로 읽고, 그 내용을 문제 형태로 푸는 독서 프로그램이 있었다. 평소에 책 읽기를 좋아한 나는 이때도 상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엄마의 칭찬은 가뭄이었다. 난 엄마의 인정과 엄마의 웃음을 발버둥 치며 받아내려 했지만 어쩌면 난 지금도 실패한다.
아마 지금도 엄마의 장롱 아래 칸에 정리되어 있을 '걸 스카우트 단복'을 입고 마을을 나설 때가 있었다. 초록색 스카프를 돌돌 말아 하얀 블라우스 칼라 아래에 반듯하게 묶어 줄 때가, 엄마의 따스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기억 속 일이다. 그 후 엄마의 스킨십은 없었다.
상담을 공부하면서 엄마와의 화해가 필요했다. 어쩌면 어른이 되어 처음일지도 모를 한 이불 아래서 둘만이 잠을 자게 되었다. 내가 먼저 엄마의 손을 잡았지만 처음 마음과는 달리 끝내 엄마와의 스킨십은 더 연결되지 못했다.
"엄마 나 이런 이런 거 힘들었었어"
엄마는 어색해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을 섭섭함으로 꽉 메웠다. 아버지와 자식들 때문에 당신 삶의 고단함이 더 컸음을 이야기하시곤 등을 돌려 주무셨기 때문이다. 상속에 대해서 잘라 말씀하던 그때처럼 마음이 닫혀버렸다.
만약 우리 오빠들이 이 글을 본다면 아버지에게 받은 부당한 대우를 떠 올릴지도 모르겠다.
'너만이 누린 혜택은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고.. '.
내가 원했던 건 엄마의 한마디뿐이었다.
'네가 그랬었구나. 미안하다 '
아흔을 바라보는 우리 엄마는 지금도 여전히 나의 삶에서 이루어내는 것들을 인정하는 건 어려운 일인 거 같다. 여전히 내가 오빠들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건 속이 쓰린 것처럼 보인다. 나의 거절당한 어릴 적 기억이 지금도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 엄마 '라고 화를 내고 있다.
엄마와 화해를 한다는 건 나의 거절당한 수치심이 '괜찮아 그럴 수 있지'라고 용납되는 것일 거다.
이젠 내가 나를 확실하게 인정해 주는 걸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