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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Apr 24. 2024

그저 되는 것은 없다(2)

대가지불

청년이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붙여온다.

호칭은 원장님 때론 권사님 본인이 내키는 대로 부른다.


그날도 행사로 바쁜 아침, 얼굴을 마주치자마자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아마 어느 누구도 말상대를 해 주지 않는 분위기이다.


"원장님!"


"저도 원장님처럼 살고 싶어요.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면서 하고 싶은 거 하며 사시는 거 부러워요."


"나도 이렇게 살래요."


한참이나 '직장을 구하고 싶다. 어린이집을 소개해달라'에서부터 시작해서, '권사님과 이야기할 수 있어서 힘이 생긴다'까지 자신감으로 충만해진 톤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청년에게 정색을 했다.


"지금의 나는 그냥 이루어진 게 아니에요. 00의 나이보다 훨씬 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하고 얼마 전까지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아온 대가예요"


단호한 나의 말투에

"그렇죠?"

하며 나에게 뒷모습을 보였다.


서른 중반.

마땅히 직장도 없다.

아무에게나 본인의 필요를 당당히 요구하며 살아간다.

챙겨 온 팬티조차 없어서 새벽 3시에 다른 청년에게 연락을 했단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상황임에도 본인은 섭섭하기만 하다.


'왜 아무도 나를 챙겨주지 않는 거야'




구르마를 덜덜 밀고 간 곳은 텃밭이 아닌 마당의 꽃들 앞이다. 있어 보이게 정원이라 말하고 싶지만 마당이란 표현이 더 내킨다..


우리 집 마당은 잔디밭과 꽃밭, 그리고 텃밭으로 나누어져 있다.

잔디밭과 텃밭을 관리하는 건 남편이지만, 꽃밭을 가꾸는 건 오롯이 나의 몫이다.

역할은 확실하다. 아니 관심을 두는 곳이 확실한 것이다.

물을 줄 때도 남편은 텃밭에만, 나는 꽃밭에만 준다.

가족들의 말처럼 돈 안 되는 일에만 관심이 가는 건 뭐 어쩔 수가 없다.


한 달 전 남편이 필요한 곳에 사용하라며 거름 몇 포대를 구르마에 쏟아부어주었었다.  발효되면서 나는 냄새와 가스를 날려 보내야 하기 때문이란다.


요 며칠 날씨 탓인지 사용을 많이 한 탓인지 손가락마디가 부어올랐다. 그럼에도 나의 삽질은 힘차다. 여기저기 한 삽씩 영양제 주고 나니  반짝 햇살이 따갑다.

! 크림


덜덜덜

빈구르마를 밀고 오다 보니 보라색 붓꽃이 꽃몽우리를 터뜨렸다.

보라색 마당을 기대하며 지난 늦가을 옮겨 심은 '아주가'꽃이 제법 피어올랐다. 그 람에 작년 봄마당을 주름잡던 백리향은 풀이 꺾였다.



모처럼 그네에 앉아 흔들거리다 보니 그 청년이 궁금해진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요즘 본지가 꽤 되었는데.

여전히 희망사항만 늘어놓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까?


쿡쿡 쑤셔오는 손가락 통증에 손가락을 만지작거려 본다.

불룩한 손가락마디가 느껴온다.


그래! 그저 되는 일은 없다.

무어든 대가가 필요하지.


오늘은 시골어른들의 만병통치약(친정엄마의 의견) '판피린'한병 들이키고 일찍 자야겠다.


참고로 판피린감기. 몸살약



꽃이 큼직한 독일붓꽃
번식력 최고 아주가
향이 좋은 쟈스민
지금은 지고없는 무스카리
수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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