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모든 추억이 사라지네. 1

진짜 백수가 된 날. 1년 후 다시 만나자 약속했는데...

by 바다의별


어린이집 철거 할 거야.


작년 여름 제주도에 다녀왔다. 이번에도 청소년들과 함께 떠나는 꿈을 찾는 여행이었다.


인파 바글바글한 제주도에서 코로나에 감염이 되었다. 싸한 느낌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진단키트로 검사를 했고, 선명한 두줄이다.

전 해 나로부터 감염 경력이 있는 남편은, 질겁을 하며 가까이 사는 둘째 네로 급히 피난을 갔다.

이틀 동안 그들의 동거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린이집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다'는 톡이 가족방에 올라온 것이다



어린이집으로 소풍을 갔다.


넌덜머리 나게 도망가고 싶은 곳이 어린이집이었지만 난 다시 돌아와야 했다. 더 이상 어린이집 평가인증을 미룰 수가 없었다. 평가인증이 없으면 모든 지원이 중단되는 '보육진흥법'이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평가인증에 대한 트라우마는,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컴퓨터에 전원을 켜는 것조차 거부하게 했다.

나의 몫까지 다른 분들에게 맡기다 보니 인건비의 지출은 등골이 휘게 했다. 25일 급여일이 되면 아직까지도 조급증이 온다. 보험 하나씩 깨고, 남편이 주는 용돈 운영비로 보태고, 그렇게 5년이란 시간을 내가 누리는 백수생활의 대가로 지불했다.


그럼에도 '우리 아이 졸업 때까지만요.' '다른 곳에 갈 곳이 없어요.' 여전히 가족 같은 학부모님들과, 선생님들 때문에 어린이집은 나도 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깁스한 오른쪽 팔은 수술한 지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아 겨우 손가락만 움직일 수 있었다. 어라. 믿었던 선생님들은 코로나19로 인한 가정보육이 잦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관점에선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다. 최소한 완벽(?) 해야 하는 나는 또다시 어린이집 운전대를 잡았고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난 두 손가락으로 일주일 만에 모든 서류를 완벽하게 해 내는 성과를 올리고 말았다. 선생님들의 수고까지 곁들여져 부득이했던 안전 부분을 빼고 모든 영역이 만점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2층을 상담실처럼 꾸몄다. 괜찮은 더블 침대도 자리 잡고, 창문 아래엔 남편이 편백나무로 딱 맞춤한 책상을 설치해 주었다.


창문엔 하얀 목양목 커튼으로 빛을 가렸다. 그리고 몇 개의 커다란 화분으로 포인트를 준 거실 옆 식탁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이제는 어린이 집에서 소풍 온 것처럼 놀아요. 차 마시러 오세요'


그렇게 백수 아닌 백수생활은 접었고, 나는 어린이집에서 노는 원장으로 돌아왔다.



'코로나 19' 감염이 준 후유증.


그러나 다음 해 5월이 가까워질 때쯤, 나는 '코로나 19'에 감염이 되었다. 지인과 어린이집에서 커피 한잔 했을 뿐인데.

그 당시엔 확진과 동시에 119 차량이 와서 거점병원으로 실려 갈 때였다. 나는 뒷문으로 왔다가 뒷문으로 사라졌는데, 모든 원생과 교직원들은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학부모님들은 어차피 수시로 가정보육이 공지되던 시기라, 격리비를 100만 원 가까이 받는 덕에 크게 불만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내가 괜찮지 않았다.

나로 인해 남편만 감염이 되었을 뿐이지만, 교회에선 난리가 났다. 그리고 주위의 학교에선 우리 어린이집 이름이 노출된 채로 코로나 주의 문자가 공지되었다. '개인정보법' 위반이다.

우여곡절 끝에 사과문을 공문으로 받아냈지만, 나는 또다시 타의적, 자발적 격리 생활이 3개월 동안 이루어졌다.


나는 8월 말. 학부모님들께 개인적 연락을 드리고, 운영위원회를 통해 1년간 '휴원한다'는 공문을 공식적으로 보냈다.

'1년 후 다시 만나요'


너무나 감사하게 한 달의 시간을 드렸지만 일주일 만에 원생들은 다른 원으로 옮겨갔고, 한 달의 시간 동안 어린이집은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3명의 친구들이 9월 말일 자로 떠나면서, 나의 긴 어린이집과의 여정은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시청에 '휴원' 서류를 제출 함과 동시에 진짜 백수가 시작되었다. 통합보육정보센터에는 모든 숫자가 ㅇ로 표기되었고. 지인들의 궁금증이 폭발했지만, 나는 이미 백수생활에 익숙해 진지라 별 어려움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그렇게 1년이 다 되어 갈 즈음 남편과 아들의 일방적 통보가 전해져 온 것이다.



'엄마의 모든 추억이 사라지네.'


사실 주어진 휴원기간 1년 동안 '무얼 해야 할지' 지난 10년 치보다 더 많은 고민을 했다. 휴원 소식이 거의 알려질 즈음부터 조언들이 넘쳤다. 다른 사업을 해야 하나? 카페를 할까? 노인복지 사업이 대세라는 데. 건물을 팔고 놀아? 뭐 등등 우리 가족도 모이기만 하면 의논을 했다.

처음엔 믿지를 않았지만, 백수엄마의 통장은 진짜 0원이란 걸 알았을 때 아이들이 카드를 주었다.


"엄마 병원 가거나 필요할 때 마음 편하게 사용해. 원장님들 만날 때 기죽지 말고"


사실 자주 사용하진 않지만 보험처럼 챙겨두고 있다.

통장잔액 0인데 너무나 태평한 '한량 엄마'의 주머니를 어떻게 채울 것인지 논의 지루하게 이어졌었다, 성격 비슷한 두 부자의 만남은 카톡 통보와 함께 다음 날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엄마의 모든 추억이 사라지네.' 사진 한 장과 함께 둘째의 톡이 올라왔다.


20년 치. 나의 모든 손을 거쳐 간 손때 묻은, 나름 카페처럼 예뻤던 어린이집 내부는 그대로 무너져 있었다.

아직 서류상 어린이집인데. 아까운 저 물건들. 내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작은 도서관 많은 책들이 먼지 속에 초라했다.


장마기간에 한쪽 수도배관이 터져 바닥이 물바다가 되었다고 옆집에서 연락이 왔단다. 며칠의 시간이 지난 터라 내부는 이미 습기로 엉망이었단다.


내 성격을 너무 잘 아는 둘째가, 재빠르게 대신 결정 해 준 것이다. 아까운 추억들을 못 버려서 또다시 주섬주섬 챙길까 봐 내가 움직 일 수 없는 틈에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꼭 필요한 중요한 것들은 이층으로 정리가 되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게 나의 소중했던 오랜 추억은 잡아 볼 틈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시청에 간단한 폐원 서류를 제출했다. 딱 30분 걸렸다



지금 어린이집 건물은 멋지게 리모델링되어 시에서 운영하는 기관에 세를 주었다.

임대사업자이니 여전히 진짜 백수는 아니다.



어린이집 2층 나의 공간
사용하지 못한 새로 꾸민 ㅇ세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