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인정이 필요했어.

심리학이 이렇게 재미있었어?

by 바다의별

나의 오지랖은 못 말린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


휴식을 하는 5년 동안 조금 심하게 우울증과 조울증을 앓고 계신 분들이 계셨다.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관계 속으로 빠지게 된 것이다.

교회 소모임 공동체 중 하나인 사랑방 리더로서의 섬김 중이었다. 어쩔 수없이, 기질대로, 나도 몰래, 그분들의 삶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다.

그분들의 삶을 내가 변화시킬 수 있다는 오만함에 빠져있었다. 그동안 학부모님들과 나누었던 상담 경험과 부모교육과정 등에서 배운 방법들을 나름대로 적용해 보았다.


내가 어깨 수술 검진으로 입원해야 하는 날,

병원으로 정기적 약을 타러 가야한다고 급하게 연락이 왔다. 사명인 양 굳이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 병원 찍고, 집 대문까지 데려다 주곤 난 입원시간을 놓쳤다.

"환자분 본인 걱정이나 하시죠"

황당해하시던 담당 의사 선생님의 그 표정은 지금도 기억난다.


그분들의 지독스러운 섬김의 요구는 나의 한계치를 덜컥 알아버리게 했다. 그리고는 도망치고 싶었다. 긴 실타래처럼 나와 엮여있는 인연들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나의 지독한 ‘착한 사람 콤플렉스’탓에 나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난 후에야 조금 벗어났다.


그분들이 그토록 감추고 싶어 했던 본인의 아픔을 인정하고 교회를 떠나기 전까지 정체불명의 공격과 수치는 오롯이 나의 몫으로 돌아왔다. 그분들과의 관계는 어쩌면 지금도 나의 목줄을 조여오는 올가미처럼 치명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도 '인정'이 필요했어.

내게 허락된 백수 아닌 백수생활은 끝이 다. 평가인증을 계기로 어린이집으로의 복귀가 이루어진 것이다. 평가인증준비 겸 ‘영. 유아 부모상담' 과정을 밟게 되었다. 꽤 오랜 시간 공부를 하다 보니 심리상담에 대한 기본적인 이론들은 나름 안다고 자부했지만 제대로 실패를 경험해 본 지라 궁금했다.


'거기까지가 아름다움입니다'라는 시 한 편과, 정감 가는 야생화 사진 한 장으로 강의가 시작되었다.

교수님은 자신의 이야기로 심리상담의 이론과 실제들을 풀어나가셨고, 머리로만 기억된 것들이 가슴으로 다시 전달되어 왔다.


기질검사가 있던 날.

친근했지만 피곤함에 허스키한 목소리의 교수님은 마스크 너머로도 어떤 표정인지가 느껴져 왔다.


"저는 거절을 잘 못해요. 늘 Yes맨이거든요.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가 제 속에 있어요. “


그러면서 친정엄마의 흉(?)을 슬쩍 보셨다.

교수님은 언니 셋에 오빠가 하나인 막내시라고 했다. 귀하디 귀한 아들 아래 출생순위. 안 봐도 훤했다. 나랑 완전 반대인 출생상황이지만 친정엄마의 본인을 향한 부당한 대우에 대한 예를 거침없이 풀어놓으셨다.

나는 격하게 공감했다. 이분과의 10주간 수업은 내 내면 깊숙한 곳을 살펴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3남 1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딸들 수두룩한 김 씨 집안 집성촌인 시골 동네에서 아들을 셋씩이나 순풍 순풍 낳을 때까지 멸치 대가리 한 마리(친정엄마의 표현) 사 온 적이 없던 아버지가 나를 낳은 날 미역을 사서 오셨단다.

아버지는 잔칫집이나 상갓집에 다녀오실 때면 도시락(얇은 나무도시락에 떡이랑 전이랑 이것저것이 담겨있었다)을 드시지 않고 꼭 챙겨 오셨다. 그리곤 나만 가만히 주셨다. 가끔 흙투성이 찌든 주머니에서 사탕 몇 개를 꺼내주시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때 얼마나 못생겼는지 동네 아줌마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시면서 '팔방미인'이라 놀려대셨다. 하여튼 난 못생겼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이 아줌마 덕에 난 오래도록 외모 열등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리 넉넉지 않은 살림에 명절이면 엄마의 한복을 잘라 만든 설빔을 나만 입곤 했다. 배가 볼록 나온 탓에 치마 앞부분이 덜렁 들렸었다고 엄마는 흉인지 무언지 가끔 이야기를 하신다.

아버지는 동네 처음으로 흙벽돌로 ㄱ자 집을 지었다, 그리고 국숫집, 과수원 등 끊임없이 일을 벌이셨지만 성과는 그리 썩 좋지는 않았다. 성공 지향적인 엄마는 아버지의 뒷수습으로 지친 탓에 집안 분위기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다행스럽게도 하나뿐인 딸로서 혜택을 누리고 있던 나는, 그 아줌마의 말씀처럼 이런저런 상장을 받아오는 팔방미인이었다. 그러나 엄마에겐 쌓이는 상장이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은 거 같았다. 엄마의 칭찬은 늘 가뭄이었지만, 아버지에겐 유일한 비타민이 되었다. 사춘기가 되었을 때 오빠들이 다 떠나버린 집에서 엄마 아버지의 고래 싸움에 난 등 터진 새우였다.


나에게 씌워진 ’ 하나뿐인 딸‘의 프레임은 엄마의 하소연을 고스란히 담아내야만 했다. 비타민처럼 살아내는 것이 넌덜머리 나게 버거워지는 시기였다. 난 결혼을 하는 걸로 도망을 갔다. 그러나 이후에도 여전히 오래도록 누군가의 비타민이 되어주는 삶이 나의 삶이라 스스로 인정했다. 이래서 가정환경은 중요하다. 그것이 나의 삶에 하나님 허락하신 가장 가치로운 달란트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혼 후에도 남자만 우글대는 시댁에서 막내였다. 우리 집도 나 빼고 남자만 셋이다. 내가 침묵하면 순식간에 '초상집 저리 가라'로 분위기는 내려앉는다. 그 무게가 싫어 늘 재잘거렸다. 누군가에게 비타민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과한 사명감은 오지랖이 넘치게 했고, '착한 사람 콤플렉스'로 나를 소진케 한 것이라는 걸 남이 아닌 내가 바라보게 된 것이다.

'영ㆍ유아 부모 상담' 과정은 나의 심리에 대한 폭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다음 해에도 똑같은 강의를 다시 수강하게 되었다. 마침 코로나 19 팬데믹이 시작된 시점이어서 3년 정도의 시간은 심리학에 대한 불타는 학구열로 채웠다. 조금 과장해서 웬만한 논문하나 다시 써도 되려나.




나는 나를 찾는 여행을 시작했고, 나답게 살기로 또다시 선택했다.

그 선택은 또 다른 걸 결정하게 했다.


대학교 1학년때 수성못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