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남자, 남편이야기는 '사랑'이라 앞에서 슬쩍 드러냈고, 둘째 남자인 첫째와 셋째 남자인 둘째 이야기다.
원래 글을 쓰기는 다섯 번 안쪽 순서였지만, 근질거림을 꾹 참으며 지금까지 미루었다. 두 아들이야기는 입을 여는 순간 자랑질일 것 같아, 초반부터 원성을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첫째의 닉네임은 '기둥', 둘째 아이는 '희망'이라 저장이 되어 있다.
나의 기둥.
큰아이(첫째)는 닉네임에서도 느껴지듯이, 어린 엄마(?)를 둔 덕에 엄마를 챙겨야 했다. 아이의 성품이 그런 건지(유전적 요인), 내가 그렇게 양육을 한 건지(환경적 요인), 어려서부터 동생과 함께 엄마의 생일이나 특별한 날엔 꼭 이벤트를 했다.
5살 때쯤 일이다. 우리 아이가 다니던 체육관에서 '축. 생일.' 핑크빛 리본이 달린 커다란 꽃다발이 배달되었다. 그리고 '따르릉' 전화가 울렸다.
"어머니 생일 축하드립니다."
"어머. 어떻게 제 생일을 아셨어요?"
"00가 며칠 전부터 엄마생일에 무얼 선물해야 하냐고 계속 물어서"
"우리 아이가요? 그래도 이렇게 큰 꽃다발을.. "
겨우 5살짜리가 엄마 생일선물을 고민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기특해서 보내주신 거라고 하셨다.
어느 해는 동생과 함께 자그마한 가방과 허리벨트 하나를 포장해서 왔다. 어린아이가 걸어가기엔 꽤나 먼 거리에 있는 백화점엘 동생과 같이 갔단다. 엄마 생일선물 줄거라 가방 고르는 꼬맹이들이 대견스러웠는지, '이거 엄마에게 전해줘' 판매원이 벨트 하나를 더 주셨단다.
그 이후에도 우리 아이의 생일선물은 한해도 빠짐없이 이어진다.
'왠수'같은 남편의 일터는 지방에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남편이 집을 방문하는 날은 늘 외식을 했다. 지금도 아이들은 근처에 있는 닭갈비 집. 불고기집을 기억한다. 무전기 같은 핸드폰이 처음 나왔을 때 '폼생폼사' 남편의 손에도 어김없이 들려있었다(본인은 업무상 필요했다고 한다).
준비되지 않은 엄마인 나도 친정 엄마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큰아이가 대화 상대이고 의논 상대였다. 둘째가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는 순간에도, 큰 아이는 기둥처럼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나는 부끄럽지만 긴 시간을 큰아이의 기둥에 기대어 있었다. 그리고 나의 '비타민'이라 자랑을 했다. 물론, 지금도 어디에 자랑해도 부족함 없는 30대 후반의 능력 있는 직장인이다.
보호자의 역할이 바뀐 채로 오래도록 지내 온 탓인지, 큰 아이는 백수엄마의 빈 주머니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 고민에 고민이다. 나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지방에선 '부동산 부자'인데, 대 도시에 사는 큰 아이의 입장은 정말 다르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브런치'를 몇 년 전 소개한 것도 큰 아이다. 늘 새로운 것들을 가장 먼저 소개해 주었던 것처럼, 지금도 대책 없는(큰아이 입장) 부모의 노후를 위하여 플랜을 제시한다. 안타까운 건 나이 든 부모가 제대로 섭득을 못한다는 것이다.
'아들! 미안해. 그래도 수시로 엄마 공부 하거든. 나는 숫자 엄청 싫어하는 완전 오리지널 문과 출신이야. 누구보다 먼저 내 글 구독하며 응원하는 거 알고 있어. 고마워 '
나의 희망
늦은 밤, 뜬금없는 둘째의 연락에 걱정부터 했다.
"엄마 난 어떤 아들이야?"
"왜? 무슨 일 있니?"
"아니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서"
"음~~ 딸 같은 아들? 친구 같은 아들인 거 같아"
살짝 실망했나 보다. '세상에서 최고인 아들''제일 사랑하는 아들' 뭐 이런 걸 기대했던 건가?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동영상' 한편을 보고 전화를 했단다. 다들 그렇게 이야기를 했단다(동영상에서). 나와 같은 대답은 없었단다.
"인터뷰한 사람들 중에 이런 엄마와 아들이 없는 거겠지"
"엄마! 나 낳은 거 후회한 적 없어?"
"당연하지. 왜 후회하니"
등등 이야기를 나누고 "잘 자" 전화를 끊고 나니, 촉촉했던 둘째의 목소리가 한참 동안 남았다. 나도 '사랑해'라고 먼저 말하지 못한 아쉬움이 조용히 밀려왔다.
둘째의 친구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가면 '우리 둘째 가요. 우리 둘째 가요.' 내가 그런단다. 그런데 그 소리가 엄청 부럽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꾸는 꿈들의 반은 둘째가 원인을 제공했다. 지독한 사춘기 아들 탓에 '아동 복지학'을 전공했고, '대안학교'를 꿈꾸었고, 청소년을 향한 비전을 늘 품었다. '네가 원할 때에 언제든지 다시 공부해. 엄마가 꼭 공부시켜 줄게' 둘째와의 이 약속 때문에 나는 돈을 벌어야 하는 목적이 있었다.
정말 불행 중 다행스럽게 아이는 군에서 다친 얼굴 흉터 때문에 '보훈 대상자'로 선정되었고, 모든 등록금은 지원된다. 가 보자! 박사과정까지!.
글을 적다 보니 내가 '한량'이 된 건 둘째 탓인 거 같다. 돈을 벌어야 하는 다른 목적을 찾아야 하나?
'아들! 너의 어떠한 멋짐도, 너의 어떠한 연약함도, 너의 그 어떤 모습도 아닌, 그냥 나의 아들로서 너를 사랑하며 축복한단다'
넷에서 여섯으로.
아빠의 등살에 둘째가 3월에 먼저 결혼을 했다. 같은 해 12월 '아직 아빠가 될 준비가 안 되었어' 이렇게 말하던 큰아이가 결혼을 했다. 4에서 6이 된 것이다.
남자들 우글거리던 무언지 어색했던 집안이, 자주 모이게 되었다. 아낌없는 아빠의 안주 제공에 힘입어, 밤늦도록 마당엔 실외등이 켜졌다. 고기 굽는 냄새에 무단 취식하는 고양이가족들이 몰려들 때쯤이면, 우리 집 고정 레퍼토리가 방송되기 시작한다.
'옛날 아빠가~~~.
그때 형이~~~.
그때 희망이가 ~~~.
그때 엄마가. '
그때 엄마가...
이야기를 하다 보면 결론은 고생한 엄마이야기다. 나는 30점짜리 엄마였다고 늘 말을 하는데 우리 아이들은 그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