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진정한 성장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 카를 구스타프 융
이젠 지독히 외로웠던 나의 10대와 화해하고 싶다 이른 새벽 카톡에 올라온 기도문은 나를 울컥하게 했다.
읽는 순간부터 그냥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해 준 것처럼. 60이 가까워 오기까지 나를 오래도록 지배하는 감정이 있다면 '불안감'이지 않을까 쉽다. 혼자여서 다시 외로워질 것에 대한 불안이다. 난 공동체에서 끼리끼리 뭉쳐있는 걸 보면 화가 나는 걸 넘어 혐오한다. 화장실 갈 때도 끼리. 밥 먹을 때도 끼리. 무얼 섬겨도 끼리. 솔직해지자면 나의 그림자이지 않을까 쉽다.
나만의 끼리를 만들고 싶은 깊은 욕구.
난 지독히 외로운 10대를 보냈다.
오빠만 셋인 나와는 달리 우리 동네는 왜 그리 딸 부잣집이 많았는지. '땅따먹기''고무줄놀이'라도 할라 치면, 어휴. 언니들의 기술을 전수받은 언니들과 또래 여자아이들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어쩌다 말다툼이라도 일어났을 땐 벌 때 같은 공격이. 난 싸울 줄을 몰랐는데. 김 씨 집안 집성촌인 마을엔 6촌 8촌 되는 언니들이 있었지만 일찌감치 돈벌이에 나서야 해서 큰 언니들은 겨우 이름을 기억할 정도였다. 그래서 난 늘 막내 오빠를 쫓아다녔다. 막내 오빠를 따라 앞 산을 올랐고, 막내 오빠를 따라 냇가에서 물놀이를 했다. 막내 오빠와 꼭꼭 약속도 했었다. 우리는 커서 오빠는 '양로원', 나는 '고아원'을 하자고 했다. 내가 열 살이 넘어 가던 해.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큰 오빠는 상당한 멋을 부렸고 연애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긋지긋했던 둘째 오빠의 사춘기는 오랜 시간 우리 가족을 악몽처럼 시달리게 하는 시작이 되었다.
중 3이 되던 해. 나의 유일한 보호자(?)였던 막내 오빠가 집을 떠났을 때 나는 절망했다. 늘 아버지의 넘치는 보호 속에 있던 나는 막내 오빠가 그렇게 힘든 줄 몰랐다. 이어지는 사업실패와 나름 자기 멋에 살아가는, 소신 있는(?) 두 오빠들 덕에 아버지는 술로 버티어야 했다. 그럼에도 오빠들을 향한 기대를 포기하지 못해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는, 처절한 몸부림의 엄마를 바라보며 난 외롭다 못해 분노했다. '난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일기장에 기록된 나의 진심은 막내 오빠를 통해 들통이 났다. 몇 안 되는 내 친구들도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직장과 야간 고등학교로 떠나버렸고, 나만 덩그러니 남아야 했다. 얼마 후 막내 오빠가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제 오빠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었던 거 같다. 여고 1학년. 모든 선생님이 예뻐하시던 친구들이 나의 베프가 되었다. 걔들은 늘 빳빳이 다려진 새 하얀 카라가 달린 교복을 입고 있었다. 잘 포장된 몇 개의 생리대가 담긴 작은 손가방을 꺼낼 땐, 견디기 힘들게 부러운 친구들이었다. 난 생리대가 필요하다고 부탁할 사람도 없었는데. 하필 그들은 시내에 집이 있었다. 난 수업이 끝나면 내가 웃지 않으면 웃을 일이 없는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자전거로 30분이 넘는 거리를 혼자 달려서. 그들이 전해주는 어제 먹은 떡볶이와 저녁에 만난 남자 동창생 이야기를, 묵묵히 듣는 시간들이 길어질수록 난 그들과의 거리를 좁혀가야만 했다. 그렇게 여고 3년 내 혼자서 등 하교를 했고 혼자서 교회에 갔다. 그곳에서도 어른들 틈 속 여고생 한 명이었다.
결혼을 했다. 낯선 그곳에서도 아직 풋내 나는 새댁일 뿐이었다. 그리고 나 혼자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동안 부부들이 같이 운영하는 원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굳이 잘 만들어진 연합회가 있는데 부부 동반 모임을 따로 만들어냈다. 난 그들과 무척이나 친한 듯 보였지만 (mbti '극'E 유형), 그곳에 있어도, 그곳에 없어도, 나의 불편함은 극에 달했고 그들을 관계 속에서 버리기로 했다.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도 난 또다시 끼리끼리를 보았다. 나의 발작 버튼은 또 눌러지고 말았다. 아파도 너무나 아팠던 나의 50대. 그리고 다가올 나의 인생 이막을 위하여, 이젠 '혼자'라는 외로움에 치를 떨며 소비해 버린 나의 아픔의 시간들을 토닥이며 놓아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