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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원영 Apr 18. 2017

내 안의 그림자 받아들이기

칼 융의 그림자와 자기성장

칼 융이 주창한 개념 중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림자는 보통 내가 의식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열등한 측면이라 불리우며, '열등'이라는 단어 탓인지, 억눌러야 하지만 튀어나올 수 있으니 적당히 달래야하는 무언가로 인식된다. 융은 그림자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음에도, 대중적으로는 '뭔가 나쁘고 어둡지만 자기실현을 위해 감싸안아야 하는 것' 정도로 인식하여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극복해야하는 과제 쯤으로 여긴다. 여기에는 그림자가 나쁜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림자는 '내 것이라 인정하고 극복해야하는 나쁜 것'이 아니라, '잘 사용하지 않아 녹이 슨, 계발해야 하는 나의 특질들'이다. 나라는 사람을 다채로운 경험 속에 놓고 풍요로운 감정과 깨달음으로 이끌고 싶다면 꼭 구동해야하는 녹슨 엔진이, 그림자라는 것이다. 단지 그걸 마주하는 개인이 가진 두려움이나 불쾌함이 그림자에 덧씌워져 부정적으로 이미지화된 것이라 생각한다.


고야의 판화에는, 그림자에 대한 인식 뿐 아니라 그 의미도 잘 드러나있다.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판화 시리즈《로스 카프리초스(Los Caprichos: 변덕들)》중 43번. 프란시스코 고야 作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는 어둠 속에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든 인물을 표현한 작품이다. 잠이 든 인물의 주변에는 부엉이와 박쥐, 스라소니와 같은 야생 동물들이 둘러싸고 있어 악몽과도 같은 꿈이 현실과 결합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야는 판화집을 처음 구상했을 때 판화집의 제목을 ‘수에뇨(sueño)’, 즉 ‘꿈’이라고 부르려고 했으며,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를 판화집의 속표지로 삼고자 했다. 이 작품을 위한 1797년 데생에는 “상상이 이성과 결합되면 모든 예술의 어머니, 모든 경이로움의 원천이 된다”고 해설을 덧붙이기도 했다. 궁극적으로 그가 추구했던 것은 이성과 상상 사이에서 태어난 균형 잡힌 예술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네이버 미술작품 설명에서 발췌)




이성=사고,의식. 내가 내 것이라 철썩같이 믿으며 통제하는 세상은 익숙하고 밝은 낮(빛)의 세계이다. 하지만 이성이 잠들면(인식하지 못하는 측면, 통제 밖의 나. 마치 만취하면 튀어나오는 나답지 않다 여기는 민망한 부분처럼), 낯설고 때로는 무서운 것들이 튀어나오는 어두운 밤(그림자)의 세계가 된다. 그래서 그건 꿈, 상상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 뒷편에 자리하고 있다.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이런 면들의 뒤쪽에, 그림자가 있다. 내가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편이 아니고, 주로 집에서 혼자 책 보는 것을 좋아한다면, 나의 그림자는 사람들에게서 에너지를 얻는 외향적인 성향이다. 도덕적으로 늘 엄격한 잣대를 갖고 있고, 모범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면, 내 그림자는 일탈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방종에 가까운 자유를 쉽게 취하는 성향을 가진다. 조신하고 성적으로 보수적인 편이라면, 내 그림자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제한없는 방식으로 성적 쾌락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에 충실하다.

겉으로 드러난 면이 강할수록 그림자의 측면도 강해진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가 진한 것과 같은 이치로 말이다. 그래서 겉으로 강하고 단호한 측면을 갖고 있으면 그만큼 억눌린 부분도 강력하다. 세상은 작용과 반작용으로 이루어져있고, 강한 작용이 있으면 강한 반작용도 따라오기 마련이다. 내가 의식적으로 강하게 사용하는 어떤 면이 있다면 그림자 역시 강해지고, 이는 무의식 영역에서 두려움으로 작용하여 외부에 투사된다.

어떤이가 사람은 성적으로 고결하고 순수하다고 여기고, 그래야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면, 그는 그렇지 않은 반대 성향의 사람에 대해 불편한 느낌을 가진다. 강하게 비난하거나, 옳지 못하다고 하기도 한다. 굳이 표현하지 않더라도 그런이들과 가까이하지 않으려 하거나, 동정하기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각자 알아서 살고 존중하는거죠,라고 흔쾌히 말해도 한켠에서는 내가 저렇지 않다는 것에 대한 묘한 우월감을 가지기도 한다. 뭐가 되건, 감정이 일어난다.

내 안에 갖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감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길 가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내 안에 없는 것들이기에 별 생각이 안 들지만, 그들 중 하나가 내가 헤어진 옛 애인과 닮았다면 순간적으로 감정이 일어난다. 똑같은 생판 남들인데도 내 안에 있는 기억이 외부로 쏘아져서 감정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를 결정짓는다. 이게 투사다. 나에게 없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분야라면 감정도 일어나지 않고 첨예한 견해도 딱히 가질 일이 없다.

그림자 역시 같은 이치로 외부에 투사된다. 내 그림자에 요부가 있기에, 그런 타입의 여성을 보면 감정이 생겨 비난하거나 부러워하는 것이다. 비난 등으로 격하게 표현할수록 억눌린 요부의 그림자는 크고 짙다. 극보수성향의 여성혐오자들은 보통 남성보다도 여성의 애정을 격하게 갈구할 것이다. 엄마나 성녀 수준의 모성적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수녀같은 순결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마초적이고 여자를 함부로 대하는 겉모습을 강화하고 있지만, 사실 아이처럼 엄마같은 여성에게 무한한 돌봄을 받고픈 유아적 소망이 그림자로 크게 또아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성형한 것만 기막히게 찾아내고 미녀를 헐뜯는게 몸에 밴 사람들은 본인이 남성에게 성적으로 어필하고 싶은 그림자를 키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이걸, '넌 사실 네가 부정하는걸 갖고 있는 모순된 존재잖아, 이 부끄러운 놈아'로 받아들여야 하나? 고야의 판화 속 튀어나온 괴물들처럼 들키면 수치스러우니 우겨넣고 아닌 척하거나 끝까지 부정해야 할까? 융은 아니라고 한다. 그림자는 단순히 '잘 쓰지않아 잊고는 있지만 많이 쌓일수록 에너지가 커지는 측면'일 뿐이니 괴물처럼 여기고 키울게 아니라 적절히 사용하고 계발해서 양지로 끌어내 볕을 쏘여주라고 한다. 억눌린 욕망을 건설적으로 충족시키면서 스스로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그림자를 창조의 원천으로 사용하라고 한다. 그것이 자기(self)를 통합하여 실현하는 길이라고 한다.

요부의 그림자를 가진 여성더러 갑자기 요부가 되어보라는게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건강한 남녀가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다가가는 과정에서 오고가는 성적인 긴장감을 즐겁게 받아들이기를 선택할 수 있다. 때로는 관능적인 옷을 입고 화려한 화장을 할수도 있다.




내향적인 나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사람을 잘 만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에 둘러싸여 왁자하게 지내는 파티장의 사교가 성향이 그림자로 밀렸는데, 여기에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픈 욕구가 같이 숨어 있고 부족하다 느끼면 외로워지기도 한다. 그럴때면 이를 부정하기 위해 '어차피 돌아서면 까먹고 다 자기만 생각하는게 사람인데 그렇게 무의미하게 만나서 겉으로만 친한척하는 공허한 관계는 뭐하러해 시간 아깝게!'라고 합리화를 한다. 불신을 외부로 투사하는게다. 그러면서 파티장 사교가 타입의 사람은 저래봤자 마음은 허할거라며 넘겨짚어 폄훼한다. 내 안의 사교가를 쓸 자신이 없으니 그림자에게 들으란 듯이 조용히 있으라 경고하는 것 같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새로운 사람(물론 내가 먼저 친해지고 싶다고 느껴지는 경우 한정)에게 먼저 다가가서 관계를 맺기로 했다. 내 안의 사교가 기질을 계발한 셈이 되었다. 하지만 다수에게 쓰는 것은 원치 않기에 소수에게 사용한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이 상관없이 만나서 내적인 교류까지 하게 된 생판 남이었던 사람이 너댓명이 되고 지금도 늘어나고 있다. 생각보다 유능한 사교가가 내 안에 있었다는걸 발견하니 관계가 전보다 풍요로워졌다.

그림자는 실눈 뜨고 쳐다보면서 억지로 인정해야하는 괴물이 아니다. 보석을 채취하듯 캐내어서 적절하게 사용하고 나를 확장하는 것에 쓸 귀한 원석들이다. 보석이 있는 어두컴컴한 광산과도 같다. 그림자를 알아보는 방법은, 내가 투사하고 있는 것(저건 불쾌해, 부러워 등 내 특징과 반대되는 것이면서 감정이 일어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를 발견했다면 기꺼이 보석 캐듯 일부를 건져올려 색다른 경험으로 바꾸어 일상에서 시도해보고, 느끼고, 조율하면 된다. 그런 시도와 경험들은 나를 더 키워내고 연마해서 더 확장된 자신을 만나게 해 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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