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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열무를 다듬는다는 건

by 바다의별

"백수가 무어 그리 바빠?"


그렇게 말하던 남편이 같이 백수놀이를 한다.

남자가 부엌일을 하는 건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라 생각하는 60년대의 사고방식을 고수하던 남편이 다라이를 들고 마당 텃밭에서 열무를 솎아왔다.


그리고 배추 몇 포기도 뽑았다.

김장을 담글 기대에 벅찬 남편의 마음을 아는지 며칠 퍼부은 가을비덕에 배추가 엄청 자랐다.

남편과 같이 놀기를 원하시는 옆집 아저씨가 '배추가 금값이니 시장에 내다 팔자'고 우스갯소리를 하시고 집으로 돌아가셨다.


남편은 아무 말없이 손바닥 길이만 한 열무를 다듬는다.


며칠 전에는 반짝 햇볕에 땅콩을 따서 말렸다. 김천 산꼭대기에 남편이 저질러놓은 꽤 큰 평수의 논밭이 있다. 몇 년을 묵혀놓았다가 올해는 땅콩과 고구마를 심었다.

고구마는 아직 영글지 않아 수확을 미루기로 했다.

반쯤은 벌레가 시식한 유기농 땅콩이다 보니 멀쩡한 땅콩을 고르는 건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묵묵히 땅콩을 고르는 남편옆에 같이 앉았다.


"자네랑 같이 하니 빠르긴 하네"

그러면서도 내가 골라내는 땅콩을 힐끔힐끔 확인을 한다. 내가 더 꼼꼼하게 골라내는 것 같은데 남편은 내가 미덥지 않다.


지금은 열무를 다듬는 남편의 손길이 내가 미덥지 않다.

며칠 허리가 안 좋아 병원에 입원을 했던 터라 쪼그리고 앉고 싶지는 않았다.


모르겠다.

집안일하는 사진을 찍어 가족톡에 자랑하는 걸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사진 두 컷을 찍어주고 난 집안으로 들어왔다. 왠지 폭풍 잔소리를 해 댈 것 같아서.


다행이다.

얼마 후 깨끗하게 다듬어진 열무와 배추가 얌전하게 다라이에 담겨 싱크대위에 놓여있었다.


명절에 시댁엘 가면 시아버지 같은 큰 시숙님께서 야채를 다듬고 계셨다.

시댁에서 담그는 김치는 방앗간에서, 말린 통고추와 마늘, 생강을 넣어 갈아서 온다. 이러다 보니 김치 양념 색깔이 내가 흉내내기 힘들다.


방앗간을 다녀오는 역할은 늘 시숙님 몫이다.

명절이면 직접 재배한 찹쌀에 갖은 견과류 한켜와 흑임자가루를 한켜 깔은 찰떡은 도시에서 보는 자그마한 사이즈가 아니라 두부 한모 사이즈다.

커다란 소쿠리 한가득 담긴 찰떡을 시숙님께서 차에서 내려놓으면, 형님은 뜨거워 손대기도 어려웠지만 맛을 보라며 큼직 큼직하게 썰어 주셨다.


시댁에 도착함과 동시에 '대감마님'으로 변신하는 남편은 끊임없이 'ㆍㆍㆍ대령하라' 말만 늘어놓는데 형님의 지시(?. 부탁)대로 움직여 주시는 시숙님이 너무 부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지 찌개라도 끓일라 하면 청양고추 몇 개, 파 몇 뿌리를 다듬어 온다.

나도 자연스레 "ㅇㅇ아빠. 파 두 뿌리만" 기분 좋게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남편을 보는 것이 익숙해졌다.


올해 세 포기 심은 가지는 풍년을 넘어 대 풍년이었다. 며칠만 지나면 열댓 개가 넘게 수확되는 가지는 처치 곤란이 되었다. 건조하기로 했다. 툭툭 잘라 소쿠리에 담아 놓으면 남편이 햇살 좋은 곳에 널어주었다.


가을장마가 수시로 내려서 남편의 순발력이 필요했다. 비 소리가 들리기 전에 소쿠리는 비가 맞지 않는 곳으로 옮겨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반짝 햇살이 나면 다시 내다 놓아야 한다.


오늘은 병원에 예약이 되어 있어 다녀왔다. 그리고 김치 담그기가 시작되었다.

꽤나 많은 채소를 절여놓고 양념 만들기를 시작한다.

마늘과 생강은 냉동실에 넉넉하게 다져 놓아져 있다. 남편이 말려놓은 고추는 물에 깨끗이 씻어 몇 토막을 낸 후 미리 끓여 식혀놓은 찹쌀풀과 함께 믹서기에 갈아주었다. 이때 집 냉장고에서 찾는 이 없는 사과즙도 두어 봉 넣어 준다.

방앗간에서 갈아온 색깔만큼은 아니지만 곱다.

적당량 젓갈과 직접 담근 매실청으로 단맛을 내고, 고춧가루를 조금 더 추가한 후 버무려준다. 간은 남편이 봐준다.


"ㅇㅇ아빠. 김치 간 봐줘요"

"무얼 귀찮게. 자네가 간 보면 되지.

흠 그래도 간은 내가 봐야지"


투덜거림인 듯, 기다렸다는 듯, 와서 간을 봐준다. 전라도 입맛답게 젓갈 조금만 더 추가하잖다. 까나리 액젓 조금 더 부어주었다.

그리고 남편은 빠뜨리지 않고 한마디 한다.


추석 때 올 큰 아이네 줄 김치는 따로 담아두란다.


시어머님이 그러셨듯이(지금은 큰 형님이)

남편은 멀리서 오는 큰 아이네 차에 실어 줄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거다.


다행히도 집 가까이 사는 둘째는 꼬막무침 외에는 내가 싸준 반찬보다 사 먹는 걸 더 좋아한다. 어쩌다 보낸 밑반찬은 1년이 넘도록 냉장고에 있는 걸 본 적도 있다.


아직 한주가 더 남았지만 우리 집은 벌써부터 추석 음식 준비 중인 거다.

택배가 왔다.

남편이 주문한 엿기름이란다. ㅋ

미덥지 않지만 그래도 '툭' 하고 던진 나의 말을 기억하고 두 봉지씩이나 주문한 남편의 성의를 생각해서 담주엔 식혜를 다시 해야겠다.


여성호르몬의 분비가 많아진 탓인지, 나와 같이 백수놀이 중이어서 그런지 잘은 모르겠지만 열무 다듬는 남편의 모습은 그래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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