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궁금한데요. 지난주 시 어머님을 그리신 이유가 있나요?"
오래도록(바다의 별을 오픈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함께했던 선생님과 숙제를 하기로 했다.
'노인미술치료사' 자격증 과정을 이수중이어서 실습할 대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지만
'뭐 그 쯤이야. 백수할머니인데.'
오늘은 두 번째 만남의 시간이었다.
지난주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려보셔요."
난 거침없이 돌아가신 지 한참이나 된 시어머님을 슥슥 그린 것이다.
나도 뜬금없었지만 선생님에겐 꽤나 궁금한 일이었나 보다.
"친정엄마도 아닌 시어머님이라니 특별한 기억이 있으신가 봐요"
지난주 그림을 꺼내놓으며 물었다.
바삐 그렸지만 내가 보아도 참 고운 어머님이 쪽진 머리와 한복을 입고 계셨다.
지난주에는 친정엄마 얘기로 서러운 내 맘을 쏟아내느라 그림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아버지와 오빠들로부터 상실된 기대치로, 무얼 해도 엄마의 칭찬이 궁색했던 나의 10대가 너무나 억울했던 20대 초반이었다.
머리에 비녀를 꽂은 쪽진 머리에, 한복치마를 허리에 질끈 동여맨, 약간 낯선 복장의 시어머님을 처음 뵈었다.
마냥 해맑은 나의 손을 잡으시고 촉촉한 음성으로 남편을 내게 부탁하셨다.
그 첫 부탁은 너무나 많은 우여곡절 끝에 '왠수'에서 '사랑'으로 변하기까지 나를 지탱하게 한 가장 진심 어린 마음으로 전달되었다.
어머님 칠순잔치 날.
소감한마디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셋째00(남편)가 잘 살아주어서 너무나 고맙고 좋습니다"
늘 어머님을 곁에서 모시는 큰 형님과 둘째 형님 마음이 어떠하셨을지 지금도 아찔하다.
가장 아픈 손가락이던 남편 덕에 나는 꽤 시댁 어른들의 칭찬을 받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늘 내편이었던 어머님.
사회경험이라곤 전혀 없는 철딱서니 없는 며늘애였을 텐데.
낯 설고 대화마저 어려웠던(사투리가 장난 아니었음) 20대의 나의 시댁은 좌충우돌 버거운 나를 서툴게나마 따뜻하게 보듬어 주셨다(경상도와 전라도의 문화차이).
명절이면 오랜 장거리 여행에 지쳐 늦잠을 잤다.
나는 삐거덕 방문을 열면서
"이제 그만 일어나거라. 가서 너거 성(큰형님을 뜻함) 도우거라"
하는 어머님 목소리에 겨우 눈을 뜨곤 했다. 시간만 나면 잠에 곯아떨어진 나를 위해 배 하나를 슬그머니 들고 오시던 어머니. 그리고 나의 폭풍수다가 시작되면 어머니는 묵묵한 웃음으로 들어주셨다.
나의 20대는 너무나 생뚱맞고 어색한 결혼생활이었지만, 아주 가끔씩 뵙는 어머님과 시댁식구들의, 투박하지만 아낌없는 칭찬이 버티어내는 힘이었지 않을까 쉽다.
친정엄마에게 그토록 듣고 싶었던 칭찬이 결핍된 나의 어린아이는, 시어머님과 시댁식구로부터 위로받았던 거 같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난 시댁에 가는 걸 불편해하지 않는다.
2월 꽤 추운 날.
"너가 나한테 예수님을 전했지. 네 덕에 내가 성경책도 읽는다."
이렇게 말씀하시던 어머님은 새벽기도를 가시다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입원하신 지 일주일 만에 가족들의 얼굴을 잠시 알아보신 후 천사처럼 하늘나라에 가셨다.
'진짜 천국이 있나 보다.'
살아계실 때보다 더 편안한 어머님의 얼굴은 모두가 그렇게 말하게 했다.
요 며칠 불쑥불쑥 치밀어 오는 친정엄마에 대한 서러움 때문인지,
아님 엄마의 붕어빵 같은 내가 엄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용을 쓴 탓인지 맘이 버거웠다.
오늘은 따스하게 잡아주셨던 그 손길과 눈빛을 다시 떠올려본다.
어머니
잘 계시죠?
많이 감사했어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