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딛는 자리에서 시작되는 삶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잖아!
조용히 해, 이 바보야!
밑에 있는 놈들이 다 듣겠어.
저기 좀 봐. 기둥이 또 있어.
그리고 저기도… 사방이 온통 기둥이야!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의 한 장면. 호랑애벌레가 애벌레 기둥 꼭대기에 다다를 때쯤, 위에서 속삭이는 소리였다.
애벌레들에게 저 꼭대기는 이상향이었다.
서로를 밟고 오르는 잔혹한 경쟁이었지만, 포기할 수 없는 꿈이었다. 그 기둥은 욕망의 집합체이자, 타자의 욕망이 되고픈 욕망이 뭉쳐진 것이다.
애벌레 기둥은 마그리트의 공중의 성과 묘하게 겹친다.
하늘로 향할수록 발밑의 현실은 잊히고, 감각은 둔해진다. 높이 오른다는 것은 곧 현실과의 접속을 잃어가는 일, 그 불안한 균형 위에 저마다의 성을 쌓는다. 성취와 경쟁으로 세워진 우리 사회의 불안을 닮아 있다.
존재란 몸으로 느끼고 감각하는,구체적인 삶 그 자체다.
날이 더해 갈수록 존재는 감각 위에 세워진다는 사실을 배운다. 타인과의 비교에 무뎌지고, 타인의 시선에서 점차 자유로워진다.
선선한 가을 바람이 몸을 감쌀 때, 옆 사람의 살결이 스치듯 닿을 때,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발이 닿는 땅, 살이 맞닿는 관계, 살아내는 매일의 순간 속에서 나의 존재와 살아있음을 실감한다. 그 순간들이 새삼 새롭고, 기쁘다.
'나'가 서 있는 자리는, 성채 아래 파도치는 바다처럼 험난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곳에서 살아간다.
내일의 죽음을 인정하며 오늘을 살고, 도약과 추락 사이에서 실존의 중력을 느끼며, 또 한 발 내딛는다.
마침내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나의 땅’을 가진다.
이 땅 위에 다시,
진짜 나의 삶을 지으며,
새롭게 타자와의 관계를 쌓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