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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Oct 10. 2021

다른 인종과 결혼하는 게 죄라니요(1)

Loving v. Virginia (1967)

저자의 그림입니다... 


지난 편까지 미국법의 체계를 공부하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저는 코끼리 다리 만지는 정도의 상식을 가지고 미국에 넘어왔는데 매번 예기치 못한 곳에서 "오잉? 이건 왜이렇지?" 하는 의문에 부딪치곤 했습니다. 여전히 코끼리 다리 만지는 기분, 영어로는 muddling through하는 기분이지만 이 또한 커먼로의 본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하튼 드디어 실제 미국 판례로 들어서보도록 하겠습니다. :) 



너무 다양한 미국의 법들 


미국은 나라가 크고 연방의회는 물론 50개의 주가 각자의 법률을 만드는 만큼 이상한 법도 많습니다. 


잘 알고 계시다시피 우리나라에서는 동성혼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구청에 동성혼 신고서를 접수하면 반려가 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제36조 제1항은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규정이 결혼을 '남녀 간의 결합'으로 한정한다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해석입니다. 일본에서는 최근 삿포로 지방법원에서 동성혼 신고 반려가 위헌이라는 결정이 있었다고 하네요, 어쩌면 우리나라에서도 곧 제도가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에서 동성애를 '위법'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요. 동성애에 부정적 감정을 품는 사람은 있을 수 있겠지만 동성애자라고 해서 경찰에 잡혀가거나 오스카 와일드처럼 재판에 회부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불과 2003년까지 Sodomy Law (한국어로 하면 수간 법...입니다)라고 하여 동성 간의 성행위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규정한 주들이 있었습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Texas v. Lawrence (2003) 판결에서 Sodomy Law가 개인의 프라이버시권에 반하여 위헌이라고 판단을 하게 되면서 경찰이 가내에 침입해 동성애자를 잡아가는 시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Tyron Garner와 John Geddes Lawrence 커플이 승리한 후 (출처: Houston Chronicle) 



백인의 '순수성'에 목을 멘 버지니아 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어려움을 겪고 이주여성의 인권 문제가 종종 뉴스거리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다른 인종과의 결혼이 법적으로 금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에서는 인종 간 결혼을 범죄로 규정한 주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반인륜적인 법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1920년대 미국 버지니아 주에는 400명의 백인 남성으로 구성된 '미국 앵글로색슨 클럽'이 있었고, 이 클럽을 이끄는 사람은 뿌리 깊은 백인우월주의자인 월터 플레커(Walter Plecker) 박사였습니다. 플레커 박사는 주  정부에서 1912년부터 총 34년 동안이나 인구 통계 관리 책임자로 근무하였습니다. 그는 백인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을 매우 중시했기 때문에 흑인보다 옅은 피부를 지닌 미국 원주민(Native Americans) 등이 백인과 결혼을 하고 함께 교육을 받는 것을 경멸했다고 합니다. 또 백인이 순수성을 잃게 될 경우 시민문명이 파괴될 것이라는 종교적 수준의 믿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월터 플레커 박사(출처: 위키피디아)


플레커 박사는 미국 버지니아 주 의회를 설득하여 1924년 인종 온전성 법률(Racial Integrity Act)을 통과시키는 데에 성공합니다. 이 법률은 모든 주민을 백인(White) 또는 유색인종(Colored)으로 구분하고 이를 출생신고서 명시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백인으로 분류되려면 조상의 피에 코커시언(Caucasian) 외의 인종이 포함되어서는 안되었습니다. 극히 예외적으로 미국 원주민의 피가 1/16 이하로 섞인 사람은 백인으로 분류해주었는데, 이를 '포카혼타스 법'이라고 불렀습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에 1명 원주민이 있고 나머지 직계가족이 모두 백인이라면 백인으로 보아준다는 것입니다. 


The Racial Integrity Act of 1924 


즉, 조금이라도 색깔이 섞인 사람은 모두 흑인과 같은 유색인종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당시 버지니아 주에는 인종분리(racial segregation) 정책이 있었기 때문에 유색인종으로 분류되면 백인과 같은 시설에서 교육을 받거나 백인의 거주지에서 퇴출되었고 직업을 찾을 때도 차별을 받았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흑인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된 많은 사람들은 버지니아 주를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백인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던 만큼, 이 법률은 백인과 유색인종 간의 혼인은 물론 성행위까지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혼혈아를 낳는 것(misgenation)은 중죄(felony)에 해당하여 1~5년의 징역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플레커 박사는 1846년, 자그마치 86세까지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끊임 없이 사람들의 가계도를 추적하여 백인 행세를 하는 이를 잡아내는 데에 놀라울 만큼의 열성을 보였다고 합니다.  


*참고: 월터플레커의 흑백 세계: 버지니아 주에서 "제3의 인종"을 뿌리뽑으려고 노력했던 무명의 공무원 (The Virginia Pilot, 2004/8/18, 영문) 



백인과 흑인이 결혼했으므로 징역 1년


하지만 아무리 법률로 금지하고 있다고 한들 사람 간에 사랑이 싹트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겠죠. 비교적 온건한 인종분리가 이루어지던 센트럴 포인트 지역에서는 흑인과 백인이 어느 정도 교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리처드 러빙(Richard Loving)은 똑똑한 흑인 여성 밀드레드 지터(Mildred Jeter)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1958년 밀드레드가 20살이 되던 해에 첫 아들을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은 인종 간 결혼이 가능한 워싱턴 D.C.에 가서 혼인신고를 합니다. 


최근 아마존에서 개봉한 "Loving"이라는 영화는 두 사람의 사랑과 법정 다툼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버지니아 주 경찰은 러빙 부부의 집 근처에 잠복하고 있다가 밤늦게 들이닥쳐 두 사람을 체포합니다. 백인 남성인 판사는 워싱턴 D.C.의 혼인신고서는 버지니아 주에서 효력이 없다고 판단하였고, 해당 법률을 위반한 두 사람에게 징역 1년형을 선고합니다. 영화에서는 백인인 리처드는 체포 후 조사를 받고 바로 풀려나지만 밀드레드는 임신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흑인이라는 이유로 하룻밤을 유치장에서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판사는 두 사람이 향후 25년간 버지니아 주에 돌아오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집행유예를 선고합니다. 



1960년대 흑인인권운동에 큰 결심을 하는 밀드레드


1960년대는 미국에서 흑인 민권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던 시기입니다. 다른 섹션에서 소개할 Brown v. Board of Education (1952)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흑인과 백인의 인종분리 교육이 위헌이라고 결정했지만, 많은 주가 이 판결에 반발해 인종분리 법들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흑인 여성이 버스에서 자리 옮기기를 거부했던 유명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이 발생한 것이 러빙 부부가 결혼한 1958년, 그리고 마틴 루터 킹 박사님이 "I have a dream" 연설을 했던 것이 1963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 버지니아에서 쫓겨나, 가족과 경제적 터전을 잃게 된 리처드와 밀드레는 워싱턴 D.C.에서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흑인인권운동이 전국적으로 커지는 것을 보며 용기를 얻은 밀드레드 러빙은 미국 연방법무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정말 이 편지를 읽어본 케네디는 ACLU라는 인권변호사 단체에 사건을 검토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법무부장관이 인권변호사 단체에 사건을 이첩하다니, 조금 이상하지요? 요즘 미국 연방법무부는 위헌이라고 생각하는 주 법률에 직접 대항해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곤 하는데, 아마 당시에는 법무부의 자원을 동원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ACLU(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는 미국 로스쿨에서 정말 많이 이름을 들을 수 있는 조직입니다. 저도 한 모임에서 ACLU 변호사를 만난 일이 있는데 명함을 받고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인 것 같아요."라고 제가 잘 모르는 소리를 하자, 그 변호사가 크게 웃으며 "네, 저희는 매일 트럼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합니다."라고 답변했던 기억이 납니다. ACLU는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100년이 넘은 공익 변호사단체로 동성애자의 권리, 표현의 자유와 프라이버시, 선거권, 낙태권 등을 위한 법정 다툼을 불사해 온 모임입니다. 빼어난 여성인권변호사로 유명세를 날렸던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대법관도 ACLU 소속이었습니다. 로펌에 비해서는 적지만 꽤 괜찮은 수준의 급여를 받으면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일할 수 있으므로 제가 다니는 로스쿨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꿈꾸는 직장이기도 합니다.


ACLU의 행진 모습(출처: procon.org)


ACLU 입장에서도 러빙 부부가 꼭 필요한 재원이었습니다. 각 주에 산재해있는 인종결혼금지법이 문제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ACLU가 곧바로 위헌소송을 제기할 수는 없고 반드시 그러한 법률로 인해 피해를 본 당사자가 직접 소송을 제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에는 '기획 소송'이 많습니다. 통상 부당한 처분을 당한 사람은 소송을 제기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잃은 것이 많은 상태라 더 잃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높은 변호사비용을 부담할 여력이 없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반면 ACLU는 조직의 위상이 높기 때문에 기부를 많이 받고 있고, 유능한 변호사 인력 풀도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ACLU는 소송을 제기할 당사자 적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해 아무런 비용 없이 변론을 해주고 하나씩 판례를 쌓아 나가는 전략을 취합니다.


영화에서 리처드 러빙은 ACLU가 사건을 크게 만들고 언론 플레이를 하는 것을 못마땅해합니다. 그의 가장 큰 목표는 가족의 안전이었고 버지니아 주 법원 판사가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자신들의 삶도 크게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건이 커질 수록 버지니아 주민들이 자신의 부부에 대해 적개심을 갖지 않을까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ACLU는 버지니아 주의 '1924년 인종 보존 법률'이 미국 연방 수정헌법 제14조에 규정된 '평등의 원칙'(Equal Protection)에 반하기 때문에 연방대법원에서 판결을 내리지 않는 한 이 주 법률을 폐지할 수는 없을 거라고 보고, 밀드레드 러빙의 지지 하에 사건을 계속 끌고 갑니다. 


1964년, 버지니아 주에 소재한 연방 지방법원에서 첫 번째 판결이 나옵니다. 이 판결문을 읽으면 당시의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소름끼치는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 근거를 신에서 찾고 있습니다. 


전능한 신은 백인, 흑인, 황인, 말레이인, 붉은 얼굴의 인종을 창조하신 후 이들은 모두 다른 대륙에 배치하셨다. 이러한 신의 질서가 그대로 유지되었더라면 이러한 결혼은 애초에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께서 인종을 분리하셨다는 사실을 통해 그가 인종이 섞일 것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lmighty God created the races white, black, yellow, malay and red, and he placed them on separate continents. And but for the interference with his arrangement there would be no cause for such marriages. The fact that he separated the races shows that he did not intend for the races to mix.


영화에서 ACLU 변호사가 이 판결문을 읽어주자 러빙 부부는 크게 낙심합니다. 역시 세상은 바뀌지 않았어, 라고요. 하지만 변호사는 무릎을 치며 박장대소를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음 편에서 러빙 부부의 법정 드라마를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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