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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Oct 10. 2021

다른 인종과 결혼하는 게 죄라니요(2)

Loving v. Virginia (1967)

실제 Bernard S. Cohen 변호사 (출처: Francis Miller/The LIFE Picture Collection/Getty Images)


Loving 영화 속의 Bernard S. Cohen 변호사 (출처: 영화 Loving) 


버나드 코헨(Bernard S. Cohen) 변호사는 영화 속에서 신출내기 ACLU 변호사로 등장합니다. 공익의 수호자로서 사명감을 지니고 있고, 대법관 앞에서 변론을 한 경험이 있는 변호사로 이름을 알리고 싶은 열망도 있습니다. 그는 밀드레드와 리처드가 주변의 반감 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다잡고 싸움을 계속할 수 있도록 격려를 하고, 국민적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인터뷰에 등장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최종 대법원 판결이 나기 이전인 1965년에 찍힌 아래 사진에서 보시면, 밀드레드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반면 리처드는 다소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1965년의 러빙 부부(출처: AP) 



연방지방법원의 상식파괴범 수준의 판결문을 보고 변호인단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원했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급심에서 인종차별적 태도를 보여주면 줄 수록 고등법원이든 대법원이든 사건을 "들어보려고" 할테니까요. 어차피 연방 소속의 법원이라도 버지니아 주에 소재하는 이상 해당 지역의 보수적 색채를 입고 있을 테니(주 법원은 주지사가, 연방 법원 판사는 대통령이 임명을 하지만 연방 법원 판사도 해당 주의 판사나 변호사 중에서 선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위헌 결정이 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거죠. 


이전 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미국 연방대법원은 1년에 100여 건의 사건에 대해서만 심리를 개시합니다. 100:1 정도의 경쟁률을 뚫으려면 "이건 정말로 정의의 원칙에 반하므로 꼭 판단을 해봐야 한다."는 마음이 들 만큼 컬러풀한 사건이어야 겠지요. 변호인단은 이 정도의 인종차별적 판결문이라면 충분히 대법원의 관심을 끌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인종간결혼금지법은 차별이 아니다? 


당시 버지니아 주 대법원은 "1924년 인종보존법률"이 헌법상 평등의 원칙에 위반된 차별이 아니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해당 법률이 흑인과 백인을 동등하게 1년~5년 징역 이하의 형에 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경악할 만한 논리입니다. "인종 간 분리" 자체가 차별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라는 것을 애써 부정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흑인과 백인 중 어느 한 쪽만 처벌해야 진정한 차별이 되는 걸까요? 월터 플레커 박사가 백인의 우월성을 보존하기 위해 인종 간 결혼과 혼혈아 출생을 저지했다는 입법 배경이 명확히 드러나 있는데도 이런 논리가 수십년 간 존속해왔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는 당시 오랜 연방대법원의 입장이기도 했습니다. 앨러배마 주도 버지니아 주처럼 인종 차별이 극심한 곳이었는지, 당시 인종 간 성행위를 중죄(felony)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혼인하지 않은 사람 간의 간통은 경범죄(misdemeanor)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1883년 Pace v. Alabama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은 해당 앨러배마 주 법률은 백인과 유색인종에게 동등한 룰을 적용하고 있으므로(둘다 상대방 인종과 성행위를 할 수 없음. 할 경우 양쪽 다 처벌) 평등원칙 위반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유색인종 혈통이 밝혀지면 결혼이 무효  


앨러배마 주에는 슬픈 인종간결혼 사건이 또 있습니다. 앨러배마 주 대법원은 Kirby v. Kirby (1921) 사건에서 아내에게 "Negro" 혈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남편 Mr. Kirby가 자신의 부인인 Ms. Kirby를 상대로 결혼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하자 Mr. Kirby 씨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당시 앨러배마 주 대법관은 Ms. Kirby를 '육안으로 관찰하여' 혼혈임을 판정해내고 두 사람의 혼인이 앨러배마 주의 인종간결혼금지법률에 반한다는 판결을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할아버지 대에 섞였는지도 모를 피 때문에 법의 보호 밖으로 억울하게 밀려났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슬픈 마음으로 상상해보게 됩니다. 너도 나도 흑인이나 원주민 혈통을 감추고 살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꼬마들은 슬픈 마음으로 밤마다 자기 부족의 자장가를 불러주던 할머니의 사진을 폐기처분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판사가 육안으로 자신의 용모를 관찰해 인종을 알아채려고 노력할 때 Ms. Kirby는 얼마나 수치심을 느꼈을까요? 



대법원으로 간 러빙 부부 사건


미국 연방대법원은 러빙 부부 사건에 대한 심리를 허가(Certiorari)합니다. 그리고 미디어에 노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리처드 러빙은 대법원의 구두 변론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연방대법원 구두 변론(oral arguments)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내로라 하는 변호사들이 대법관들과 직접 치열하게 문답을 주고 받는 것이 녹음되며 상당 수가 무료로 공개되어 있습니다. 각각이 아주 재미있는 드라마입니다. 


* "Loving v. Virginia"의 코헨 변호사 목소리를 들어보시려면 여기에서! 좌측의 "Oral Argument"를 클릭하시면 시나리오와 함께 변론 내용이 나옵니다. 1960년대의 영어말투는 지금과 또 다르네요. 


영화에서 코헨 변호사는 대법관들 앞에 선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명예로운 일인지 아냐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지만, 리처드 러빙은 무게감 때문인지 아니면 후에 올지도 모를 실망을 줄이고 싶기 때문인지 참석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다음의 말을 대법관에게 꼭 전해달라고 합니다. 


코헨 씨, 법원에 가서 말해주십시오. 나는 아내를 사랑하며, 우리가 버지니아 주에서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불평등하다고 말입니다.

Mr. Cohen, tell the Court I love my wife, and it is just unfair that I can't live with her in Virginia."



인종분리 자체가 차별적 사고 


대법원은 9-0으로 러빙 부부의 손을 들어줍니다. 얼 워렌 대법원장은 1883년의 Pace v. Alabama 판결을 무효화하면서 "양쪽 모두를 평등하게 처벌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논리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인종 분리"적 사고 자체가 이미 자유로운 시민들에게는 끔직하게 나쁜 영향(odious to a free person)을 미치게 되며, 다른 공익적 목적이 없는 한 가장 엄격한 사법심사 대상(the most rigid scrutiny)이 된다고 말이지요. 이는 학교 시설이 같고 선생님의 수준이 같더라도 흑인과 백인 교실을 분리하는 것만으로 인종 차별이 된다고 보았던 Brown v. Board of Education(1952) 판결과 맥을 같이 합니다. 


"가장 엄격한 사법심사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 법률을 만든 주에서 중대한 공익(a compelling public interest)을 보호하기 위해 시민의 침해가 가장 적은 방법(narrowly taylored)을 택했다는 것을 입증하지 않는 이상 위헌이 된다는 뜻입니다. 즉, 버지니아 주는 결혼금지 조항에 "인종 분리" 외에 다른 중대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인종 분리"가 유일한 이유라면 그 분리를 정당화할 만한 중대한 공익적 사유가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수단을 통해서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합니다. 딱 들어봐도 거의 입증이 불가능해보이죠. 그래서 버지니아 주 플레커 박사님이 인생을 바친 인종 보존 법률은 44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수정헌법 제13조(미국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노예제도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와 수정헌법 제14조(모든 미국 국민은 평등한 법적 보호를 받아야 한다)가 제정된 것이 1789년인데, 이런 당연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정말 오래걸렸습니다.

아래 그림은 인종간 결혼금지법이 있던 미국의 주들을 표시한 것입니다. 회색으로 표시된 곳은 그런 법이 제정된 적이 없는 곳이고, 초록색은 1780년에서 1887년 사이에 폐지된 곳, 노란색은 1948~1967년에 폐지된 곳, 빨간색은 1967년 Loving 판결에 의해 비로소 폐지된 곳을 표기한 것입니다. 러빙 판결이 있을 때까지 인종간결혼금지법을 지니고 있던 주는 대부분 남쪽에 위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종간결혼금지법의 추이 (출처: Wikipedia/Loving v. Virginia)



국가가 결혼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 것은 프라이버시 침해


또 러빙 판결은 미국 프라이버시 법제의 형성에 크게 기여를 한 판결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밀드레드 러빙은 <워싱턴 이브닝 스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지, 정부와 결혼한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법률이라면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허용해야 할 것입니다. 
We loved each other and got married. We are not marrying the state. The law should allow a person to marry anyone he wants.


"인종간결혼금지법" 중에서 평등원칙 위반이 "인종간"에 초첨을 맞추었다면, 프라이버시 침해 의견은 "결혼"에 초첨을 맞추고 있습니다. 결혼은 한 인간의 존재와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개인적 의사결정이므로 누구와 결혼할지 선택하는 것은 개인이 누려야 할 본질적 권리라는 것입니다("the vital personal rights essential to the orderly pursuit of happiness by free men"). 그리고 이에 국가가 부당하게 개입하는 것은 수정헌법 제14조의 '평등원칙' 옆에 있는 '적법절차 권리'(Due Process Rights)를 침해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통상 '적법절차 권리'는 '평등원칙'에 비해 더 절대적이고 강력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평등원칙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원칙이므로 두 집단 간의 차이가 있다고 밝혀지면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 공평하다"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어느 주는 남성과 여성의 음주가능연령을 다르게 정하고 있는데(여성이 더 어립니다) 유의미한 차이를 밝혀내고 나면(여성이 더 빨리 결혼한다, 딸이 술집영업을 도와야 한다, 여성이 알코올 흡수능력이 더 좋다 등등)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지요. 한편, '적법절차 권리'는 일단 국가가 침해해서는 안 될 영역이므로 침해하는 순간 무조건 위헌으로 의심을 받게 됩니다. 


즉, 워렌대법원장은 설령 "평등한 처벌"로 인해 평등원칙 위반이 성립되지 않더라도, 국가가 중대한 공익적 사유 없이 개인적 의사결정의 영역에 침입한 것은 위헌이라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수정헌법 제14조는 "Due Process Rights"이라고만 할 뿐, "Rights to Privacy"를 명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실 "Privacy"라는 말은 미국 헌법 어디에도 명문으로 등장하지 않는데요(우리나라는 사생활 보호가 헌법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미국하면 프라이버시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저로서는 매우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연방대법원에서 수정헌법 여러 개 조항을 종합적으로 해석하여 프라이버시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Loving 판결은 결혼생활을 프라이버시 영역으로 인정한 초기 판례 중의 하나입니다. 이 프라이버시 권리는 추후 피임약을 살 권리, 동성 간 성행위를 할 권리, 동성 간 결혼을 할 권리, 낙태를 할 권리로 확장됩니다. 



우리 제발 사랑하게 해주세요 


러빙 부부는 역사적인 법원 판결을 받고 두 사람이 만난 고등학교가 있는 센트럴 포인트로 이사를 갑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리처드 러빙은 음주운전 차량에 치어 판결이 있은 후 8년만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리처드가 죽은 후에 밀드러드는 세 아이의 어머니이자 인권 운동가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Virginia v. Loving (1967) 판결의 40주년이 되던 2007년 밀드러드 러빙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을 남겼습니다. 


저는 여전히 정치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리처드와 제 이름이 판결문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 판결은 사랑과 헌신, 공정성, 그리고 가족을 강화하는 데에 기여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동성애자이든 이성애자이든, 젊든 늙었든 할 것이 삶 속에서 추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결혼할 권리를 지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Loving 판결이 의미하는 것, 바로 사랑입니다.
 I am still not a political person, but I am proud that Richard's and my name is on a court case that can help reinforce the love, the commitment, the fairness, and the family that so many people, Black or white, young or old, gay or straight seek in life. I support the freedom to marry for all. That's what Loving, and loving, are all about.

 

러빙 부부의 묘 (출처: Wikipedia/Loving v. Virginia) 



사랑과 프라이버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다음 편에서는 이 주제에 대한 판결문을 들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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