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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Oct 07. 2021

에드워드 코크 경과 마약법원



판사들이 큰 재량을 갖는 이유


Common Law 국가들은 영국의 법체계를 따르고 있는데, 영국은 의회보다 법원의 제도화가 먼저 이루어졌습니다. 왕 치하에서도 시민 간 분쟁을 누군가 해결해주어야 했을테니까요. 1100년대 영국 왕 헨리 2세는 귀족과 성직자 중에서 12명의 판사를 임명하면서 법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판사는 명망 있는 자가 임시직으로 수행하는 형태로 유지되다가 1200년대에 월급을 받는 직업 판사들이 생겨납니다. 오늘날 영국에는 7,000명의 판사가 있다고 하는데 아래 조직도에 보시는 것처럼 시스템이 매우 복잡합니다.  


영국법원의 구조(출처: www.judiciary.uk)


심지어 2010년 영국이 대법원(The U.K. Supreme Court)을 만들기 전까지는 대법관이 의회의 구성원이었습니다. 3권 분립은 현대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근간인데 입법부와 사법부가 한 몸에 있다니 제 입장에서는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영국에서 변호사를 오래 한 친구는 "대법관(Law Lords)들은 그냥 명목상으로만 상원(House of Lords)에 있었을 뿐이야. 실제로는 입법부와 완전히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있었어."라고 답변을 하긴 하였지만, 유럽인권이사회(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에서는 오랜 기간 영국 법원이 독립적인 사법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권고를 해왔었다고 합니다. 


하여튼 영국은 법체계에 있어서만큼은 변화가 매우 더딥니다. 판사들은 아무리 더워도 여전히 가발을 써야 하니까요. 영국 법원 웹사이트에서는 "과거 판사들은 아주 불편한 풀 가발을 썼지만, 지금은 약식 가발만 쓴다."고 첨언을 해두고 있네요. 그런데 이러한 '더딤'은 판례법의 기본 이념입니다. '선례를 따른다'는 것은 놀라운 혁신보다는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함이니까요. 


한편, 1215년 마그나 카르타 이후 영국의 의회도 발전하게 됩니다. 지역유지들로 의회가 구성되면서 조세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시작으로 하여 의회가 왕과 권한을 분점하게 됩니다. 오늘날 영국 왕은 의회에 거의 모든 실질적 권력을 내어 주고 의회가 공식적인 입법 기구입니다만, 1200년대 의회의 모습은 지금보다 한참 원시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의회가 스스로 고위관료에 대한 탄핵심판을 행하고 목을 매달아 처형하기도 했었으니까요. 물론 당시 법원도 온갖 고문을 자행하는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영국의 1300년대를 상상해볼까요? 핏줄이 신분이 되는 귀족제도가 굳건히 존재하고 달타냥 같은 반항적 인물들도 있었겠죠. 왕이 바뀔 때마다 왕실과 지방영주 들 간 피바람이 일어나기도 했을 것입니다. 부와 권력을 축적한 이들은 스스로 군대를 움직여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도 탐관오리들이 그랬듯 말도 안되게 세금을 올리기도 했겠죠. 교회도 재판권을 지니고 있어서 이따금 마녀사냥 같은 재판이 일어나기도 했을 것입니다. 영국 왕도 교회재판을 통해 파문이 되었었고, 이태리 출신의 갈릴레이는 교황청에서 재판을 받았었습니다. 


이런 시대는 전쟁의 잔해 위에서 나라를 세우면서 소수의 엘리트들이 모여 각국 법률을 참고해 헌법, 민법, 형법, 상법 등의 틀을 만들어나간 1900년대 우리나라와는 매우 다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업 판사들이 판결을 할 때 참고할 만한 법률이 제대로 없었을테고 (과연 영주들이 발급한 칙령 등이 문서로 제대로 남아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령 법률이 있더라도 내용이 터무니 없는 경우도 많았었겠죠. 이 때 판사들이 기댔던 것은 자신의 정의에 대한 감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논거의 타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선대나 주변 판사들이 고안해 낸 법논리를 차용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판결문이 이어져오면서 커먼로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전통이 형성된 것입니다. 


커먼로 우위의 원칙을 정립한 Edward Coke 경 


의회에 대한 법원의 우위를 정립한 판례는 1610년 Sir Edward Coke 판사가 남긴 Dr. Boham's Case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토마스 보햄이라는 의사는 굉장한 엘리트였습니다. 캠브리지에서 학사, 석사, 박사(Medical Doctorate)를 8년에 걸쳐서 마쳤다고 합니다. 그는 런던으로 이사해 개업을 하였는데, 당시 런던 의료계를 지배하고 있던 의사회(College of Physicians)와 충돌을 하게 됩니다. 1605년은 의사회에 기고 싶다고 청원을 하였는데 '공부를 더 하고 돌아오라'며 거절을 당합니다. 당시 영국 의회는 '의사회'에게 면허 없이 의료행위를 하는 자를 규제하고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법률을 제정해 둔 상태였습니다.  


런던의 의사회가 부당하게 텃세를 부린다고 생각한(그리고 아마 더 할 공부도 남아 있지 않았던..) 보햄은 의료행위를 개시하였고, 의사회는 보햄을 무면허 의료행위로 보아 구속하게 됩니다. 보햄은 위에서 말씀 드렸던 Habeas Corpus를 신청하여 일단 구금해서 풀려난 후 Court of Common Pleas에 부당한 구금으로 인해 입은 손해를 배상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합니다. 이 사건을 심리한 판사는 오늘날까지도 빈번하게 인용되는 Edward Coke 경입니다. 


당연히 의사회는 의회에서 제정한 법률에 따라 적법하게 권한을 행사하였다고 주장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햄은 의사회가 의사 면허를 부여하는 기준이 타당하지 않고, 의사회가 직접 판단을 해 법원을 거치지 않고 개인을 구속까지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정의의 원리와 의회가 지닌 형식적 법률제정 권한 중 무엇이 우위인가가 문제가 된 것인데요, 이에 대해 코크 경은 커먼로 원칙에 맞지 않는 이상한 법률을 법원이 무효화할 수 있다는 권한을 갖는다고 답합니다. 그 어느 누구도 "검사이자 판사가 동시에 될 수는 없다"며 의사회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한 의회의 법률이 잘못되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당시 이 판결문은 의회의 민주적 권한에 대한 중대한 침해로 여겨져 비판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만, 오늘날에는 꽤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의회라고 해서 국민의 권리와 이익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법률을 제정해서는 안되겠지요. 의회가 문제를 깨달아 법률을 개정하면 좋겠지만, 이러한 민주적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경우 법원이 방패막이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 챕터에서 보시겠지만, 미국에 있는 수백개의 의회에서는 정말로 이상한 법률을 많이 만듭니다. 


이렇게 영미법계에서는 판사들이 객관적인 정의를 담보하는 역할을 기대받아 왔습니다. 의회가 정해준 틀 내에서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 선출되지 않은 자임에도 불구, 선례에서 정립된 법 논리에 기초해 의회의 판단을 무력화할 수 있는 것이죠.



재미 있는 사례: 워싱턴 킹카운티 마약법원


예상했던 것보다 할 말이 많아서 글이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가벼운 사례 하나를 보고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미국의 각 주는 법원, 검찰, 경찰 등 사법시스템의 형식을 정할 수 있는 자율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원도 아주 작은 법원부터 아주 큰 법원까지 매우 다양하며 우리나라처럼 딱 3심 구조로만 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동네의 작은 법원에서 사건을 시작할 경우 4심, 5심까지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양한 법원 중에서 제가 가장 신기했던 법원은 제가 살고 있는 워싱턴 주 킹 카운티에 설치된 마약법원(King County Drug Court, 뉴욕타임스 기사)이었어요. 


이 법원은 마약사범을 처벌하기보다는 그들의 재활을 도와 건전한 시민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워싱턴 주의 마약사범이 교도소에 가면 남겨진 가족들이 더욱 가난해져 또 다른 범죄를 기획하게 되거나 교도소에서 만난 마약사범들이 모여 추가 범죄를 기획하는 등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설립된 곳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범죄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문제라는 의식이 많은 편이에요. 최근까지 명시적 차별을 받던 유색인종들의 범죄율이 높은 것을 과연 그들의 책임으로만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죠. 저는 20년 넘게 재직하신 후 최근 퇴임하신 Dean Lum 판사님의 강연을 통해 이 법원의 존재를 알게 되었었습니다.


Dean Lum 판사(kcba.org)


마약법원은 마약을 단순소지한 가벼운 혐의자가 아니라, 마약을 한 상태에서 상점을 털거나 마약을 조직적으로 판매하는 등 중대한 범죄에 연루된 사람만 대상으로 한다고 합니다(물론 당사자가 싫으면 일반 법원의 판단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아래의 프로그램 흐름도에 보시는 것처럼 대략 10개월 간의 절차에 성실하게 참여하면 기소유예처분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교도소에 가지 않을 수 있고 자신을 적대시하는 재판과정을 거치거나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아도 되니 당사자에게는 매우 큰 유인이겠지요. 


킹카운티 마약법원 프로그램 흐름도 (Dean Lum 판사 발표문, 2021.6.)



마약법원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면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공공 건강보험'(Medicaid)에 가입을 시켜주어(보험이 비싼 미국에선 엄청난 것입니다 여러분..) 정신과 상담 등 치료를 받게 해주고, 교통카드와 무제한 인터넷 플랜이 포함된 휴대폰을 지급하며, 식품과 의류, 심지어 12개월 간 체류할 수 있는 공간(!!!)도 제공한다고 합니다. 아마 이 숙소에서는 불시 검문 등을 받을 의무가 있겠지만, 시애틀의 높은 임대료를 고려할 때 매우 큰 혜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약사범이 홈리스이거나 극빈층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착안한 조치로 보입니다. 



첫째날 주어지는 리소스 (Dean Lum 판사 발표문, 2021.6.)



제가 이 내용을 들으면서 놀란 점은 이렇게 형법을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마약을 하고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안타까운 사정들이 있겠지만, 어쨌든 남의 상점을 털어 피해자들을 만든 범죄자이긴 하잖아요. 그런데 일반적인 홈리스에게도 잘 주어지지 않는 이토록 관대한 복지혜택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 부당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처벌보다는 갱생에 집중한다는 철학에는 동의하지만, 명시적으로 형벌로 규정된 법률이 있는 상황에서 법원이 이렇게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고 또 지역사회가 이러한 접근방식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굉장하게 느껴졌어요. 


제가 이런 질문을 하자 Dean Lum 판사님은 Drug Court가 프로그램 참여자 1명 당 세금을 많이 쓰고 있는 것은 맞지만 "확실히 교도소보다는 싸다."는 답변을 하셨습니다. 교도소에 사람을 수감하는 것이 절대 공짜가 아니고(침대와 음식을 주니까요)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이 사회로 돌아가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그 가족들에게 미치는 영향까지를 고려하면 이들을 사회악으로 보고 적대시하는 것보다 현재와 같은 복지적 접근이 훨씬 저렴하다는 취지였습니다. 



지금까지 1600년대 영국과 2000년대의 시애틀을 넘나들며 미국 법체계가 어떻게 고유한 특성을 지니며 형성되어 왔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영국 법원 웹사이트에는 "당신이 법원에 온다면 1,000년의 역사를 접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요, 그렇게 유구한 시간에 걸쳐 하나씩 하나씩 쌓아온 만큼 커먼로 법체계는 기본적으로 복잡합니다. 게다가 미국은 51개가 각기 다른 주 법률과 사법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니 더욱 복잡하지요. 그래서 미국법을 공부하다보면 우리나라의 깔끔한 법체계가 그리워질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급적이면 재미 있게 미국법의 살아 있는 면면을 여러분들께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인종차별에 대한 판례를 들고 오겠습니다.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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