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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Oct 07. 2021

커먼로가 도대체 뭔가요?

 

기존 계획은 판례에 대한 설명을 곧바로 시작하는 것이었지만, 판례에 대한 이야기를 쓰다보니 미국법의 특징에 대한 설명이 구구절절 이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미국법의 매력(?)을 충분히 느끼시도록 하려면 Common Law에 대해 첨언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다소 이론적인 챕터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Common Law 체계가 우리나라의 법체계보다 '지저분'합니다.  




보통법 국가에서는 판사가 법을 만든다?


통상 한국은 대륙법계 Civil Law 국가이고 영국이나 미국은 보통법 Common Law 국가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알려져 있어요. (참고)


- 대륙법 국가는 성문법(codified law)을 따르고 보통법 국가는 불문법 내지 판례법을 따른다. 

- 대륙법 국가는 의회가 법을 만들고 보통법 국가는 판사가 법을 만든다. 


사실 이 정도만 알고 계셔도 꽤 법적인 상식이 있는 편입니다. 그런데 최소한 제게는, 이 구분기준이 생각보다 명료하지가 않았어요. 영국이든 미국이든 법률을 만드는 의회가 있고 판사는 이 법률에 따라 판결을 합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판사들도 구속력 있는 법리를 만드는 권한이 있습니다. 대법원에서 판결문을 내면 모든 하급심을 구속하므로 거의 법률과 같은 지위를, 때로는 유명무실한 법률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지닙니다. 한국에서도 헌법재판소가 법률을 무효화시킬 수 있고, 법률이 미흡한 경우 법원은 개별 사건에서 구체적인 해석방식을 정하니 어떤 의미에선 판사가 법을 만듭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공부하는 내내 양자 간의 차이가 명확지 않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작은 듯 큰 듯한 두 가지 차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로스쿨에서 공부를 하다보니 손에 딱 잡히지는 않지만 무언가 Common Law 국가만의 특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는 하였습니다. 다만, 제가 느낀 것들은 입법부와 사법부의 우위에 대한 문제와는 조금 달랐어요.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Common Law 국가에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법 개념들이 있습니다. 


이 개념은 법률이 명시되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미국의 판사들은 법률에 규정이 있든 없든 판사들은 1500년대 영국에 살았던 판사가 고안해 낸 개념에 의존해 판결을 합니다. 우리나라로 친다면 중국의 1500년대 원님이 내렸던 판결에서 정립한 논리를 따르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러한 대표적 사례는 대륙법계 국가에는 존재하지 않는 '불법행위'(Torts)입니다. 불법행위는 상대방의 행위가 형사범죄에 이르는지 여부에 관계 없이 내가 상해나 손해를 입었다면 금전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미국 내에서 불법행위에 대한 규정은 주마다 다르지만, 법원은 판례에 의해 정립된 개념표지에 따라 일관된 취지의 판결을 합니다.


미국 범죄드라마에 많이 등장하는 Habeas Corpus도 영국에서 유래한 개념입니다. '인신보호영장' 내지 '구속적부심 청구권' 같은 어려운 말로 번역이 되는데요, 어떤 사람이 경찰이나 보안관에 의해 구금을 당하였을 때 판사에게 자신의 부당함을 호소하여 일단 구금상태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권리입니다. 판사가 그 논리에 설득이 된다면 혐의가 아무리 중하거나 명백하거나 관계 없이 일단 풀려나서 조사를 받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에이브러험 링컨 대통령이 매릴랜드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Habeas Corpus 발동을 일시중지하고 판사들로 하여금 구금된 자를 풀어주지 못하게 할 것을 명했는데요, 당시 연방법원은 의회가 아닌 대통령이 헌법상의 권리를 중단시킬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Ex parte Merryman, 17 F. Cas. 144 (C.C.D. Md. 1861) (No. 9487))


Habeas Corpus를 설명한 만화 (출처: Amaphome.org)


그래서 미국 판례 여기저기에서 신기한 단어로 되어 있는 오래된 개념을 종종 맞닥뜨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actual malice'라고 하면 해를 입힌 것을 넘어서 당사자가 해를 입히려고 하는 진짜 의도가 있었는지를 말하고, 'quid pro quo'는 '댓가성이 있는지'를 지칭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no quid pro quo'라고 말한다면 '아무 댓가 없이내가 도와주는 거야'라는 뜻입니다.


(2) 판사들의 자율성이 매우 높습니다.


미국 판사들은 굉장히 멋진 타이틀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법원의 판사는 "Justice"라고 부르고 하급심 판사의 경우 "Judge"라고 부르거나 "The Honorable John Kim"과 같이 대단히 전지전능해 보이는 타이틀을 씁니다. 가끔 미국 드라마에서 지역 판사가 엄청나게 권력 지향적이거나 마피아와 결탁해 사익을 추구하는 캐릭터로 등장하기도 하는데요. (대표적으로 넷플릭스 드라마 Queen of South의 라파예트 판사가 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각 지역에서 판사가 지니는 영향력이 매우 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놀랍게도 워싱턴 주를 포함한 수십 개의 주에서 판사를 '선거'로 뽑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Queen of South의 Judge Cecil Lafayette (출처: Queen of the South Wiki - Fandom)


조금 더 공식적인 이야기를 해볼까요? 한국의 경우 의회가 통과시킨 법률을 무효로 만들려면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이나 장관이 발한 하위법령이 위헌 또는 상위법에 위반된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사건에서만 적용이 제외될 뿐, 일반적으로 효력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이미 공표된 법령의 효력 상실이 빈번하게 이루어진다면 그 법령에 기초해 이미 형성되어 있거나 형성 중인 이해관계에 불확실성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행정부 입장에서는 이미 위헌으로 선언된 법령에 따라 재차 처분을 할 경우 법원에서 패소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제 정신이라면) 해당 법령을 더 이상 적용하지 않고 판례의 취지에 맞게 개정하는 수순을 밟게 됩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주의 1심 지방법원에서도 해당 주의 법률이 위헌이라고 선언할 수가 있습니다. 워싱턴 주의 1심 법원 판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최근 한 판결 중 어느 것이 가장 뿌듯하셨죠?"라고 질문을 하니 "주 의회에서 말도 안되는 법률을 만들었길래 고민하다가 폐지를 시켰어요."라고 답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 미국에서는 판사 1인이 이렇게 법률을 무력화시킬 수가 있구나.'라고 생각한 기억이 납니다. 


또한 법원에서 어떤 법률이나 하위법령, 대통령의 행정명령(executive order) 등을 무효라고 결정하면 그 즉시 효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이 이슬람 이민자를 막기 위한 행정명령을 발하였다가 하와이 소재 연방지방법원에서 무효로 선언 효력을 잃게 되자 어떻게 하와이에 있는 판사 1명이 대통령을 막을 수 있냐며 분노를 금하지 못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선출되지 않은 자가(연방 법원 판사는 모두 대통령이 임명해 의회의 인준을 거칩니다) 선출된 자를 상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이민과 관련된 중요 업무에 법 공백 상태를 초래한다는 취지였죠. 해당 이민 행정명령의 내용은 매우 인종차별적이었고 폐지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연방 법원 판사가 이렇게 큰 권한을 갖는 것이 타당한지는 생각해볼 만한 문제입니다.


트럼프 이민자 행정명령을 막아섰던 하와이의 연방 판사 Derrick Watson (출처: The Guardian)


그리고 판결의 내용에서 창의성을 발휘할 여지도 훨씬 큽니다. 우리나라 뉴스에도 심심치 않게 미국 판사들이 280년 형 같은 무시무시한 형에 처했다는 기사가 뜨곤 하지요. 맥도날드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피부를 데었다는 이유로 8억 정도의 손해배상을 명하기도 합니다. 이 판결에서 배심원들은 당시 맥도날드라는 대기업에 반발심을 갖고 있어 30억의 배상을 명했는데, 판사가 8억 정도로 줄였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 뉴스에서 종종 등장하는 '징벌적 손해배상'도 미국의 판사들이 판례로 만들어냈던 개념입니다. 그리고 법률에 명시적 규정이 없는 명령도 발할 수가 있는데요. 예를 들면 명시적 규정이 없더라도 명예훼손 사건에서는 법원은 손해배상금액 외에 '지역 신문 3곳에 사과문을 게재하여야 한다.' 등을 명하기도 합니다.


판사가 이렇게 대단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보는 사람 입장에서 통쾌할 때도 있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단점도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내가 죄를 저질렀을 때 대략 어떤 후폭풍이 오게 될지(10년 이내의 형, 벌금형 등) 어느 정도는 예측을 할 수가 있습니다. 법률에 따라 판사에게 재량이 있는 경우도 우리나라 법원은 양형기준을 만들어서 각 판사 개인이 갖는 재량을 축소시키니까요. 한편 미국에서는 카운티 법, 주 법, 연방법이 적용되어 가산이 되다보면 어느 새 200년 형에 수십억 원의 배상금까지 부담하게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울며겨자먹기로 비싼 변호사를 고용하는 사람도 많지요. 


심지어 어떤 변호사들은 판사가 선거 캠페인을 할 때 수억원 씩 기부를 해서 좋은 관계를 쌓아두고 이를 클라이언트들에게 홍보하는 놀라운 일이 버젓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2009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Caperton v. AT Massey Coal Co., 556 U.S. 868 (2009) 사건에서 변호사가 주 대법관의 선거 캠페인에 30억을 지급한 경우에 해당 대법관이 그 변호사가 맡은 사건을 맡을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대법관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변호사로부터 30억원을 수령하는 것도, 수령한 후 굳이 그 사건을 맡겠다고 하는 것도 우리나라의 관점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판사들이 큰 재량을 갖도록 시스템이 설계되어 있을까요? 다음 글에서는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영국의 법원의 역사에서부터 그 실마리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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