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벨뷰의 정원 Oct 11. 2021

미국 판결문은 왜 이렇게 긴가요?

유튜브까지 인용하는 미국 연방대법원

깔끔한 한국 판결문


지난 2년간 여느 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영어 읽기와 쓰기는 제게 무거운 숙제였습니다. 특히 그 어려움을 가중시켰던 것은 미국 법원 판례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이었습니다. 미국 판결문은 도대체 왜 이렇게 길고 문장이 이상할까요? 


대한민국의 판결문은 집필한 사람의 개인적 색채를 느끼기 어려운 딱딱한 어투를 쓰는 것이 보통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법행위의 성립요건으로서 위법성은 관련 행위 전체를 일체로 보아 판단하여 결정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문제가 되는 행위마다 개별적ㆍ상대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소유권을 비롯한 절대권을 침해한 경우뿐만 아니라 법률상 보호할 가치가 있는 이익을 침해하는 경우에도 침해행위의 양태, 피침해이익의 성질과 그 정도에 비추어 그 위법성이 인정되면 불법행위가 성립할 수 있다."

[대법원 2021. 6. 30., 선고, 2019다268061, 판결]


"피고인이 이 사건 댓글에서 기재한 ‘기레기’는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로서 자극적인 제목이나 내용 등으로 홍보성 기사를 작성하는 행위 등을 하는 기자들 또는 기자들의 행태를 비하한 용어이므로 기자인 피해자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 만한 추상적 판단이나 경멸적 감정을 표현한, 모욕적 표현에 해당하기는 한다. 그러나 피고인이 이 사건 댓글을 작성한 행위는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로서 형법 제20조에 의하여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보아야 한다."

[대법원 2021. 3. 25., 선고, 2017도17643, 판결]



딱 읽어보더라도 굉장히 객관적이고 건조한 말투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법률 용어 일색이고 군더더기가 별로 없어서 집필자 개인의 특성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제가 공무원으로 재직할 때 공무원스러운 보고서 쓰기 훈련을 받았던 것처럼, 판사분들도 법원의 정제된 문체로 글쓰는 것을 배우는 듯 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판결문을 짧고 간결합니다. 대법원까지 가는 사건은 사실관계와 법률문제가 복잡한 경우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A4용지 5페이지를 넘기지 않는 것 같아요. 너무 간단해서 때로는 하급심 판결문까지 읽어보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긴 하지만, 공부를 하는 사람 입장에선 요점만 찍어주니 좋기도 합니다. 한편 미국 판결문은 50페이지가 넘는 경우를 흔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반대의견,' '동의의견'만 20페이지가 넘는 경우도 있죠. 


 

100개 사건만 맡아 공들인 판결문을 쓰는 미국 대법원 


우리나라 대법원은 대법원까지 올라오는 사건에 대해 원칙적으로 모두 심리를 하여 승소, 패소 여부정하기 때문에 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매년 4만여 건의 사건을 처리한다고 합니다. 미국에 비해서는 대법원이 400배에 달하는 판결문을 내놓는다는 것인데 업무 부담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지요. 간략한 판결문을 남기는 것은 이런 업무 과중에서 기인하는 측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 대법원 사건 처리건수 누계(출처: 법원연감)



미국 연방대법원에는 매년 7,000여 개의 사건이 접수되지만 이 중 정말 중요한 헌법적 문제를 다루고 있거나, 또는 하급법원 간 해석에 이견이 커서 조정이 반드시 필요한 사건 100~150개에 대해서만 심리를 한다고 합니다. 70건 당 1건 정도에 불과하므로 미국에선 대법원이 심리 개시를 허가(certiorari)한 것만으로도 뉴스거리가 됩니다. 특히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나뉘어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연방대법원이 모든 사건을 심리하기 때문에 상당 수의 사건이 연방 수정헌법 상의 기본권 침해와 관련된 것입니다. 



당사자 이름이 중요한 미국, 문제된 법리가 중요한 한국


다시 한국의 판결문 구조를 살펴볼까요? 아래의 판결은 위의 예시로 썼던 '기레기'라는 용어와 관련된 사건인데요, 먼저 가장 큰 특징은 피고인의 성명을 명시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판결문에서는 제한적으로 실명을 공개하는 경우도 있지만 통상 '이OO,' '김XX' 같이 이름을 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에서는 판결문 이름을 'Lingle v. Chevron'이라고 해서 원고와 피고의 이름으로 사건을 지칭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모욕,' '이혼및위자료' 같은 식으로 해당 사건에서 문제가 된 법리를 판결문의 이름으로 씁니다.

 


모욕 [대법원 2021. 3. 25., 선고, 2017도17643, 판결]

【피 고 인】피고인

【상 고 인】피고인

【주 문】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대구지방법원 합의부에 환송한다.

【이 유】

상고이유를 판단한다.
(중 략)
4.  그러므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ㆍ판단하도록 원심법원에 환송하기로 하여, 관여 대법관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대법관 박상옥(재판장) 안철상 노정희(주심) 김상환



저는 이렇게 당사자의 이름으로 판결문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에 적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어 '김민철 대 신수정' 사건이라고 하면 두 사람의 이혼 사건인지, 신수정이 김민철의 저작권을 침해한 사건인지, 아니면 김민철이 신수정이 장관으로 있는 특정 부처에서 행한 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리고 재판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 제가 그 사람 이름을 막 부르는 것도 왠지 어색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 판결문을 집필했는지가 중요한 미국 


위의 한국 판결문에서는 '누가' 판결문을 썼는지는 판결문의 맨 마지막에 가야만 알 수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는 주심인 노정희 대법관님이 판결문을 집필하신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네요. 반면, 미국은 다수의견이든 소수의견이든 누가 판결문을 집필했는지가 판결문의 가장 위에 나오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이 부분은 이 사람의 의견이구나'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게 됩니다. 이런 문단구조는 집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내 이름을 걸고 쓴다'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판결문은 장장 105페이지에 달하는 Seila Law LLC v. Consumer Financial Protection Bureau, 140 S. Ct. 2183 (2020) 판결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한눈에 보더라도 판결문 작성자가 매우 복잡한데요, 로버츠 대법관이 토마스, 알리토, 고르서치, 카바노 대법관이 동참한 가운데 다수의견을 작성하였고, 토마스 대법관이 일부 반대의견을, 케이건 대법관이 긴스버그, 브라이어, 소토마요르 대법관이 동참한 일부 반대의견을 작성했다는 뜻입니다. 동의의견(concurring opinion)은 다수의견의 결론에 동의하지만 조금 다른 논지를 부각하고 싶을 때 쓰는 의견이고, 반대의견(dissenting opinion)은 다수의견의 결론에 반대하는 소수가 쓰는 의견입니다. 


다수의견, 소수의견은 어떻게 정하는 것일까요? 최근 서거하신 스티븐스 대법관(John Paul Stevens)의 자서전 'The Making of a Justice: Reflections on My First 94 Years'이라는 책에 따르면, 재판장(Chief Justice)이 각 대법관의 전문성에 기초해 사건을 배당하면 해당 대법관이 몇 차례 토론에 기초해 자신이 채용한 재판연구관(Law Clerk)들의 보좌를 받아 의견을 작성한다고 합니다. 이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은 반대하는 이유를 자발적으로 작성하여 다시 대법관 간에 회람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반대의견의 설득력이 높아 대법관 한 두 명이 기존의 입장을 선회할 경우 반대의견이 다수의견의 지위를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Certiorari가 무슨 뜻일까? 



위의 판결문 "Certiorari to the United States Court of Appeals for the Ninth Circuit"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아주 어렵게 들리지요? "Certiorari"는 우리나라 말로는 '상고 허가'라고도 하는데, 대법원이 심리 개시를 허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The United States Court of Appeals"는 연방 고등법원을, 해당 고등법원이 "The Ninth Circuit"은 11개의 써킷 중 9번째 써킷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1심인 연방 지방법원(The United States District Courts) 의견에 대해 2심인 연방고등법원 제9순회법원에 판단한 것을 대법원이 재차 심리하였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개념으로 하면 '부산고등법원 판결에 대해 대법원이 심리를 허가함'이라는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9번째 써킷에는 제가 살고 있는 미국 워싱턴 주, 오리건 주,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가 포함됩니다. 아래의 그림은 각 써킷의 지역적 경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 옛날에는 대법관들이 여행을 다니면서 비정기적으로 항소심을 열었다고 해요. 그래서 "Circuit"(순회법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지금은 당연히 법원이 상설로 설치되어 있습니다. 

미국 연방법원의 11개 Circuit 관할 지도 



글쓰기 문화의 차이  


저는 글쓰기 문화, 더 크게는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는 문화가 미국의 긴 판결문의 전통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스펙으로 말하는' 사회입니다. 아름답게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보다는 출신 학교, 토익 성적, 전공, 경력 등이 훨씬 중요합니다. 한편, 미국은 대학 입학할 때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앞으로 꿈꾸는 미래를 엮어서 서술하는 "자기 소개서"(Personal Statement)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Mathew McCool의 <Writing Around the World: A Gudie to Writing Across Cultures (2009)>라는 책에서는 사진, 성별, 생년월일을 반드시 기재하도록 하는 일본의 이력서 문화가 서구권의 사람들에게는 생경하게 느껴진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McCool은 "저는 상업 사진을 찍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일본의 이력서 맨 아랫칸 '비고'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고 말합니다. 서구권의 이력서에는 자신의 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일본의 이력서 비교 

* 미국 이력서 출처(careeraddict.com)와 일본 이력서 출처(M. McCook, Writing Around the World, 2009, p.4)


미국 사람들은 제가 느끼기엔 거의 강박적으로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는 데에 몰두하고, 사람을 채용하는 사람들도 개개인의 스토리에 충분한 시간과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튀는 사람이 있으면 '모난 돌이 정맞는다'고 하는 아시아 문화와 달리, 미국에서는 '돋보인다(stand out)'고 생각합니다. 수업 시간에 과제를 제출할 때도 요약과 더불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주관적 해석을 쓰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좀 더 저자 중심의 글쓰기(writer-centered writing)가 독려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 중심의 글쓰기와 독자 중심의 글쓰기 (출처: Marshall Golden, "An Introduction to the Genre") 


'저자 중심의 글쓰기 문화'에서는 개인적인 감정과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좀 더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기 위해 실험을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한편, '독자 중심의 글쓰기'는 정확한 정보를 간결하게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개인의 감상이 들어갈 여지는 적고, 객관적으로 옳은 사실을 명확하고 공신력 있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한국의 명확하고 깔끔하고 개인의 색채가 드러나지 않는 판결문은 '독자 중심의 글쓰기'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개국공신, 셰익스피어, 유튜브까지 인용하는 판결문


< Selia LLC v. CFPB에서 케이건 대법관의 의견(p. 70) >


그래서 미국 판결문에는 각 판사 개인의 특징이 매우 잘 드러납니다. 어떤 판사는 두괄식으로 깔끔하게 논리적으로 판결문을 쓰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에세이를 쓰듯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기도 합니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라고 하는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알렉산더 해밀턴의 문구가 인용되는 경우는 정말 많이 있구요. 때때로 셰익스피어 문구를 인용하기도 하고, 느낌표를 굉장히 많이 쓰는 판사도 있고, 흔히 알려져 있는 영어 작문법과 다르게 '나는(I)'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케이건 대법관은 위의 판결문에서 유튜브 동영상 링크를 인용하기도 하였습니다. 


< Selia LLC v. CFPB에서 케이건 대법관의 의견(p. 70) >


또한 대법관 간의 입장 차도 가감 없이(때로는 민망하리만큼 날카롭게) 드러납니다. 반대의견은 당연히 다수의견에 조목조목 반박을 하고 다수의견도 반대의견이 왜 잘못되었는지 재반박을 하는 식이지요. 위의 판결문을 보면 케이건 대법관이 "That count, though, is wrong in every respect. The majority's general rule does not exist."라고 하여 "다수의견은 모든 면에서 말도 안되고, 그 쪽에서 제시한 일반적인 규칙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강경한 어조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판사 개개인에 대한 국민의 관심도 높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트럼프 대통령 집권 시기에 돌아가셨던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대법관(Ruth Bader Ginsburg)입니다. 백인 남성 중심의 대법원에서 양성 평등의 판결을 이끌어 내던 젊은 여성 인권변호사가 클린턴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60대의 나이에 대법관이 되어 27년간 재직하면서 '위대한 반대자'라는 칭호를 얻으며 수많은 촌철살인의 반대의견을 남겼습니다. 검은 법복 위에 흰색 칼라를 매치하고 뿔테 안경을 쓰는 패션아이콘으로 자리잡아 각종 행사에서 어린이들이 따라 입은 장면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1953년 워렌 대법원장이 이끌던 대법원과 2021년 현재 로버츠 대법원장이 이끄는 대법원(supremecourt.gov)




[덧] Selia LLC v. CFPB 사건의 개요


Selia LLC v. CFPB 판결은 의회가 독임제 부처(독임제는 1명의 '장'이 있는 구조를 말하며, 그 반대는 '합의제'와 같은 위원회형 조직입니다)에 강력한 규제 권한을 부여하고, 대통령이 그 기관의 장을 마음대로 해임할 수 없게 한 것이 헌법적으로 가능한지 여부가 다투어진 사건입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위헌이라고 판결이 났습니다.


미국은 공정거래위원회 같은 위원회형 조직의 위원에 대해 대통령이 마음대로 해임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한 법률이 합헌이라는 입장을 유지해왔는데요, 한 명이 최종 결정권을 갖는 독임제 기관의 경우에는 다수의원 간 견제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국민의 선출을 받은 대통령이 해임권을 통해서 그의 권한 남용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엘레나 케이건 대법관은 하버드 대학 방문교수로 재직하던 당시 'Presidential Administration'이라는 유명한 논문을 쓴 행정법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케이건 대법관은 다수의견과 달리 의회가 다양한 조직구조의 행정기관을 법률로 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이렇게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문은 길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그만큼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재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학생들도 이 긴 판결문을 모조리 읽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판례를 요약해서 제공하는 Quimbee, LexisNexis, Oyez(무료) 등의 웹사이트가 인기가 많습니다. YouTube에 Quimbee 판례 요약 애니메이션이 많이 올라와있는데요, 심심할 때 보시면 재미 있을 수도 있습니다. ^^ 예를 들어 여기에서(https://youtu.be/R_Qm2D0mB-4) "사기업이 정치기부금을 내는 것이 헌법상 표현의 자유에 포함된다"고 선언했던, 악명 높은 판결 Citizens United를 소개하는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전 03화 에드워드 코크 경과 마약법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