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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May 10. 2023

이름을 닮은 영혼

월요일 오후, 회사에 가지 않고 햇살을 맞으며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실 갑작스레 귓가에 오래 전 나를 스쳐갔던 다정한 말이 맴돈다


어느 투박한 회의실 같은 곳에서, 그는 순한 눈을 하고 말했다. 


이름과 영혼이 이렇게 닮아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고, 

이름이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지만.  

이름과 영혼이 똑같이 생긴 사람. 

이런 사람은 처음이에요. 

이름에 이응(ㅇ)이 많은 당신은 정말 둥글고 명랑하군요. 

이름처럼 어딘가 단호하고, 다부진 데가 있군요. 

그 일치가 참 신기하게 느껴져요. 


한창 연애가 덧없게 느껴지던 이십대였다. 십 대 부터 연애의 비열하고 이기적인 속성을 여러 차례 경험한 나는, '초연한 태도'를 신주단지처럼 여겼다. 하지만 사십대가 가까워지는 지금에 와서도 라디오 테이프처럼 그 목소리가 시처럼 재생되는 것을 보면, 어찌할 수 없는 깊은 울림을 느낀 탓일 것이다. 


이응이 많은 나의 이름은 아버지의 친구의 어머님이 지어주셨다. 이름을 주신 할머님을 흐릿하게 기억한다. 할머님은 아들의 집의 방 한 칸에 살고 계셨다. 온 집안을 호령하시던 우리 할머니와 다르게, 그 할머니는 방 문을 열기 전에는 기척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한자로 된 어려운 책을 잔뜩 쌓아두고 낮은 책상 앞에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아 읽고 계셨다. 방에선 불단에서 피우는 향과 노인의 냄새가 났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가 무엇인지 여쭈니, 불경이라고 하셨다. 할머니의 쪼글쪼글해진 얼굴에 걸쳐 있던 커다란 돋보기 안경. 말이 별로 없으셨지만 미소는 많은 분이셨다. 우리 엄마와 친했던 할머니의 며느리는 할머니에 대한 불평을 하지 않으셨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모시는 것이 힘들었을텐데. 그 분의 고요한 학구열 때문일까. 품위 때문일까. 


할머니는 스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모두가 그 할머니를 존경했다. 김소월 시인의 스승인 김억 시인의 누이이고, 우리 나라에서 주역을 통달하신 몇 안되는 분이라고 했다. 그런 할머님이 내 이름을 짓는 데에 몇 주를 고심하셔서 나는 한 동안 이름이 없었다고 했다. 내가 장차 큰 인물이 되기를 바라시며 쉬운 한자를 주셨다. 내 한자는 성을 포함해 총 17획 밖에 되지 않는다. 여자아이 이름에 많이 쓰이는 꽃부리 영(英) 대신 비칠 영(映)을 쓰셨다. 가끔 한자를 선생님들이 제대로 쓰지 못하거나, 지나가던 어른들이 여자 아이 이름으로 좋은 한자가 아니라는 핀잔을 주었지만, 어머니는 누구보다 주역을 깊이 있게 공부하신 분이 지어주신 이름이니 시덥잖은 이야기는 넘겨들어도 좋다고 단언하셨다. 


내 이름 뒤에 이런 긴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것을 나는 자랑스럽게 여겼다. 중성적인 이름을 가진 것도 좋았고, 어진 지도자라는 이름에 깃든 뜻도 좋았고(그렇게 크진 않았지만), 어른들의 시덥잖은 핀잔을 무찌르는 할머니의 박식함도 좋았다. 지금도 누군가 이름을 부를 때면, 이따금 흰 저고리를 입고 촛불앞에서 한자책을 고요하게 읽으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피가 섞이지 않은 여자아이의 이름을 짓기 위해 몇 주를 고심하는 할머니. 

그 이름의 가치를 계속 일깨워 준 나의 어머니. 

두 세대의 당찬 여성들이 만들어 주신 이름.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도,

그 이름의 가치를 높게 산 이가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나는 내 삶과 영혼이 내 이름의 값어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누군가 말해주는 것을 듣는 일은 좋았다. 

그런 막연한 감각을 언어로 표현해 준 사람을 인생의 길 위에서 스쳐갔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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