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벨뷰의 정원 Jun 04. 2023

#17. 깨진 마지막 퍼즐

어화둥둥 며느리의 시대가 끝나다


아버님과의 파국이 있은 후 2주가 지났다. 지금도 남편과는 사이가 소원하다. 남편과 어머님은 둘 다 이번 일로 큰 상처를 받은 듯하다. "우리 아빠랑 한 판 붙어!"라던 남편은, 이제 와서 내게 아빠에게 너무했다고 한다. 본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를 탓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


나를 안아주며 진심 어린 사과를 하셨던 시아버님도, 곱씹어 보니 억울하셨는지 나를 탓하는 문자를 보내셨다. 시부모님께서 공항으로 가시던 날 아침, 나는 친정엄마의 조언(간청)에 따라 "조금 더 정중하게 말씀드렸다면 좋았을텐데, 죄송해요. 마음을 열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문자를 했다.



그렇게 뼈아프게, 어화둥둥 며느리로서의 삶은 막을 내렸다.





타자화: 며느리라는 존재의 취약함

나는 예쁜 짓을 할 때만 '우리 귀한 며느리'일 수 있었다.

아버님이 나를 물에 빠뜨린 후 사과를 하지 않는 사건이 없었더라면.

나는 나의 자리가 내 행동거지에 따라 언제든 박탈당할 수 있는 허상임을, 정확히 몰랐을 것이다.


아버님의 배려 없음은 이 집안의 상식이고, 아버님의 '프리패스권'이다.

아버님은 '원래 배려가 없는 사람이니까' 남편도 어머님도 이해를 하고, 대신 작은 목소리로 면전에서 불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내가 아버님의 배려없음을 (내 목숨을 위험에 빠트렸다는 매우 타당한 이유로!) 지적했을 땐.

기껏해야 몇 번 안만난 며느리 주제에.

아버님이 얼마나 나에게만 특별한 배려를 해주신 건지도 모르는 주제에.

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시아버님은 즉시 '우리 귀한 며느리' 자격을 박탈하셨고,

나를 응원하던 남편은 시아버님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나에게 손가락을 겨누었다.



어화둥둥 며느리 시절에도 맘이 편치 않았다. 오랜 시간 서로에게 쌓인 상처로 힘들어 하는 세 명을 지켜보느라 힘든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나의 지위가 취약함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원가족의 먹이사슬 꼭대기에 있는 아버님의 이쁨을 받을 때는 몰랐는데. 아버님과 정면승부를 하고 나서야, 사실은 내가 먹이사슬 맨 아래에 있는 존재, 그들이 원하면 언제든 alienate(타자화하다)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아버님에게 답을 드렸다.

"제 처지를 확실히 알았어요. '아빠에게 무슨 말이든 다 하라'며 아버님과 대면하기를 간곡히 부탁했던 남편도 정작 아버님이 속상해하시는 걸 보고 나니 '우리 아빠가 이 정도면 얼마나 많이 참은 건데. 넌 우리 가족에 대해 알지도 못하잖아.'라며 제 말투가 직설적이었다는 둥 원망을 하더군요. 새로 온 며느리는 당연히 그 가족의 역사를 모두 알 수가 없는데 말이죠. 며느리는 2-30년 시간을 쌓아가야 비로소 가족 구성원으로 인정되는 게 아닌가 싶네요."


아버님은 또 갑자기 태도가 바뀌셔서, 둘 사이가 나빠지면 절대 안된다며, 이런 일은 가족이기에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상처가 아물면 새 살이 돋을 거라고 하셨다. 본인으로 인해 아들과 며느리의 사이가 나빠진 것 같으니 걱정이 되셨나보다. 아니면, 자신의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아들이 본인을 비호하느라 며느리와 척을 지고 있다니 내심 기분이 좋으셨나보다.



새로운 다짐

이번 여정을 통해 깨달은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어화둥둥 며느리가 되지 않는다.

말해 뭐하리.

둘째, 남편의 원가족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춘다. 

어렵사리 이해에 도달하더라도, '너 따위는 이해하지 못해'라는 소리를 언제든 들을 수 있는 지위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시간이 쌓여 자연스럽게 서로를 이해하는 경지에 이를 때까지, 무던한 마음으로 기다리자.

셋째, 시부모님에 관한 한 친정엄마에게 상담을 하지 않는다.

엄마는 본인이 살아온 방식대로 (며느리가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방향으로) 나에게 조언을 한다. 나는 엄마의 희생 덕에 험한 꼴 안 보고 잘 컸는지 모르겠지만, 엄마보다 열불을 잘내는 성격이니 엄마 조언을 따랐다간 홧병이 날 수가 있다. 여동생에게 상담을 하도록 하자.

넷째, 시부모님에 관한 한 남편의 약속을 믿지 않는다.

시부모님은 남편의 감정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이라, 남편은 자기 자신의 반응을 예측하지 못할 때가 많다.

섯째, 내가 가장 편하고 행복한 방향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지하여 남편에게 시시때때로 전달한다.

좋은 게 좋다며 꾹 참았다가는, 나중에 남편으로부터 "너도 좋다고 했잖아!"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 또 참다 참다가 "이것만은 너무 싫어. 못 참겠어."라고 말하게 되면, 시부모님을 욕하는 것 같은 꼴이 되어 남편이 반감을 느끼기도 쉽다. 가급적 긍정적인 화법으로 내가 원하는 바를 남편에게 전달하고, 나머지는 남편이 판단하도록 하자.



뻔한 말들인데 이제서야 마음에 확 와닿는 것을 보면, 나는 역시 온 몸으로 다치고 깨지는 경험을 해야 배우는 사람인가보다.



2주 여행 내내 네 사람이 모두 노력을 했는데

결국 이렇게 파국으로 끝나 슬프다.

하지만 한결 마음은 편안하다.



남편이 며칠 전 나에게 힘들지 않냐고 물어서 이렇게 말했다.



성격이 괴팍해서 학생들에게 인기 없는 선생님이 있었는데, 어느 날 한 학생이 전학을 온거야. 그런데 선생님이 그 전학생이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다며 엄청나게 예뻐해. 어떤 학생들은 저 전학생이 정말 대단한가보다- 부러워하는데, 어떤 학생들은 쟤도 선생님처럼 성격이 괴팍해서 둘이 잘맞나보다, 별로 잘난 것도 없는데 잘난 척이다, 그 전학생을 미워해.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이 전학생에게 본색을 드러내고 전학생이 선생님에게 반발하자, 선생님은 화가 나서 전학생을 다른 학생과 마찬가지로 막 대하기 시작해. 전학생은 오히려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내가 지금 그런 기분이야.





이렇게 나의 '며느라기'는 막을 내렸다.

짧으면 몇 달, 길면 수 년이라는데.

난 2년이었으니, 꽤 괜찮은 편인가?


 





Image by Piyapong Saydaung from Pixabay

작가의 이전글 #16. 우리 아빠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