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꿈을 꾸었다.
어느 여학생이 달려와서 내 소지품을 빼앗아 갔다.
돌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돌려주지 않겠다며 차라리 자기를 때리라고 했다.
해맑게 웃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너무 미워서 때리려고 손을 뻗었는데, 손이 잘 닿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 닿긴 닿았고 여학생은 몸이 흔들렸지만 전혀 아프지 않다고 했다.
그 여학생은 사실 내 신용카드를 도용한지 몇 달이 되었다며, 매 달 몇 천 불씩 화장품을 샀다고 했다.
기분이 좋은지 계속 웃고 있었다.
열을 내는 나에게 남편은
"그러게, 신용카드 내역 좀 매 달 확인하지 뭐했어."라고 핀잔을 주었다.
카드사에 사기로 신고하려고 전화를 걸었더니, 여학생이 쏜살같이 내 휴대폰을 뺏어서 달아났다.
열심히 달려가서 여학생을 붙잡았지만 자기가 산 물건들은 절대로 돌려줄 수 없으니 차라리 자기를 때리고 분을 풀라고 했다. 때리려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10대 중 2대가 닿을까 말까 였다. 잘 닿지 않으니 더 열심히 때리려고 악을 썼다.
이내 체력이 떨어져서 휴대폰도 여학생을 때리는 일도 포기했다.
집에 가서 뭐든 정리를 해야 된다면 하자-라고 생각하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여학생이 내게 본인이 Sephora에서 (내 카드로) 산 손톱정리 기구라면서 길쭉하고 날카로운 쇠침을 갖고 내가 있던 방에 들어왔다.
여전히 밝게 웃는 얼굴이었다.
순식간에- 내 왼쪽 관자놀이 깊숙이 침이 박혔다.
차가운 온도.
소름끼치는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렇게 죽는구나.'
뛰어오는 남편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고,
자연스럽게 눈을 떠보니 새벽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죽음'을 상상했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야말로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했다. 이제는 건강한 하루에 감사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 그런 생각을 덜하지만, 예전에는 스위치를 끄듯이 존재를 멈추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런 '친구 같은 죽음'이 아니라,
나를 벌하기 위한 '적극적인 죽음'을 떠올릴 때가 있다.
그런 날은,
(1) 내가 이미 어떤 잘못을 저질렀고
(2) 그 잘못이 모두에게 알려지고
(3) 내가 그 잘못을 진심으로 후회할 때이다.
내 인생을 톡톡 털어보면, 아마 '수치심 대사전' 같은 것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경우에는 당사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했고, 세상에 알려졌을 때는 상급자들에게 내 실수를 곧장 알리고 필요하면 사과를 했었다. 꽤 심각하게 번졌던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금세 잊혔다.
하지만 나는 그 세세한 잘못의 목록(시간. 장소. 피해자. 계기 등)을 잊을 수 없다. 드라마에 보면 자신의 실수를 별 거 아닌 걸로 치부하는 사람이 나오는데, 다시 태어난다면 그렇게 태어나고 싶다. 수치심대사전의 목록은 오늘도 나를 사시나무처럼 떨게 만든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때의 막막한 감정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내 몸을 조여 오는 심연 속에 갇혀 있는 기분. 집 안에만 쳐박혀 있으면서 나의 실수를 곱씹고 곱씹는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어떻게 바꿀 수 있었을지 고민해본다. 사람들의 눈이 두렵다.
오늘 수 년 만에, 한 8년 만에 그 순간이 왔다.
나의 실수가 온 세상에 알려졌다.
고의가 아니라 부주의였다.
나는 실수를 행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지적을 받고 나서야
허둥지둥 어디서 어떻게 잘못되었나, 하나하나 실타래를 찾았다.
처음엔 그 사람이 잘못 생각한 줄 알았는데.
되짚어보니 빼박 나의 실수였다.
곧바로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를 했지만,
실수를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고, 어떻게 해야 충분하게 책임질 수 있을지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게 진짜 직업이었다면 업무를 바꾸거나 사임을 하거나 뭐든 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학생이니 걸 수 있는 직도 없다.
그냥 "모두가" 아는 그 사실이 조용히 지나가기만을 수동적으로 바랄 수밖에 없다.
차츰 왜 그런 실수가 있었는지 조금씩 원인이 밝혀졌다.
다행히 처음에 겁을 집어먹었던 것 만큼 중대한 하자는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하자는 존재했고, 무서웠다.
똥 묻은 놈이 겨 묻은 놈을 나무란다고 하는데,
난 겨든 똥이든 내 몸에 아무것도 묻히고 싶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실마리를 주고 싶지 않았는데.
왜, 왜, 대체 왜.
실수를 하는 것인가.
오늘 실수를 바로 잡기 위한 후속조치를 하는 데에 하루 종일 매진을 하다가,
나를 믿어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다가,
정신적 위기가 와서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생에게 말을 꺼낼 때 손발에 땀이 줄줄 날 만큼 힘들었다.
내 목소리를 듣고 위기를 감지한 여동생은 처음에 엄청난 일이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다 듣고 나더니 "언니! 그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야. 앞으로 조금 더 조심하면 되고. 당당하게 행동해. 남들에게 먼저 말하지도 말고 죄지은 척도 하지 말고. 그냥 누군가 걱정하듯이 말 건네면 지금은 괜찮다고 실수가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그렇게 살면 돼. 왜 그렇게 죄인처럼 괴로워하고 있어."라고 웃으면서 답을 했다.
실수를 알아차렸을 때의 수치심은 여전히 이루말할 수 없지만.
과거보다 조금 나아진 점은,
나를 가만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도 모르게 3인칭 시점에서 나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웬만해서 사람은 죽지 않는구나. 웃을 수도 있구나. 밥도 먹히는구나."
"그래, 또 이런 시련이 왔네. 요즘 슬럼프에 빠졌다더니, 이렇게 정신 없이 수습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슬럼프고 뭐고 생각도 들지 않지. 너무 평온하게 슬럼프 타령 하고 있었네 ㅎㅎ"
"그래도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네. 나를 혼내지 않고, 탓하지 않고, 보호해주려고 하는구나. 이런 사람들이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 잘 보아두어야지."
이런 때일 수록, 세상이 나에게 가하는 비판보다 나 자신이 가열차게 가하는 셀프 비판을 주의해야 한다. 반성은 필요하지만 반성을 넘어서서 지나친 셀프 비판을 가하다보면 실수가 정체성을 집어삼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Be kind to yourself. 친구가 나에게 해주었던 말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평화가 내 안에 찾아와있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한 때의 해프닝이 되기를.
또 깨닫는 것이 있다.
정말 힘들 때만 브런치에 글을 쓸 동기가 생긴다는 것.
그래서 내 브런치에는 우는 소리 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