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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Sep 09. 2023

지우고 싶은 과거를 고백하던 밤


오늘 한 논문을 읽다가 학술적으로 "신뢰"(trust)가 무엇인지를 정의할 때 "취약성"(vulnerability), "긍정적 기대"(positive expectations), "태도"(attitude)가 지표로 들어간다는 내용을 읽었다.


Sunnie Kim et al. (2023)


저자들에 따르면 신뢰란

(1) 상황상 내가 취약한 지위에 있는데도  

(2) 신뢰를 줌으로 인해 자신에게 부정적인 결과가 돌아오지 않으리라 믿고 있으며

(3) 상대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 한다.


신뢰라는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단어 속에 '취약함'이라는 기피하고 싶은 관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렇다면, 나는 왜 내가 신뢰하는 남편에게 나의 잘못으로 인해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나누지 못하는가?

그를 신뢰하지 못해서 취약함을 드러낼 수 없는걸까?

이번 주 내내 나의 큰 실수가 공식적으로 만천하에 드러남에 따라 바쁘 피폐한 나날을 보냈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조금은 억울했다. 다크서클은 짙어졌고, 남편은 왜 요즘 그렇게 힘이 없는지 의아해했다. 모든 일이 전부 인터넷으로 일어나는 비대면의 시대. 내가 털어놓지 않는 한 남편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도저히 남편에게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공유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너무나 부끄러웠기 때문이겠지. 그래도 신뢰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조용히 피폐해지는 모습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싶어 어젯 밤 큰 맘을 먹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내 자신의 실수를 용서하지 못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아."


남편이 "사람이 누구나 그렇지."라고 답했다.

"그치. 누구나 반성은 하는데... 나는 좀 수치심 트라우마라고 해야 하나. 자아 비판이 너무 심해."

"사실 나도 그래..."

라고 하면서, 남편은 갑자기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유학생 시절 한국에서 용돈을 송금받던 남편은 부모님께 폐를 끼치기 싫어 6인이 한 방을 쓰면서 하루하루 라면으로 근근히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보니 친구들에게 박하게 굴게 되는 순간들이 좀 있었나보다. 나는 그 '고난의 행군' 시절 남편을 평소에 안타깝게 여겨서인지, 그 정도 일은 잘못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당신 행동으로 인한 피해가 거의 없잖아...?"

라고 물었더니,

남편은 "그렇긴 하지. 그래도 내 안엔 잘못된 의도가 분명히 있었어. 계속 그렇게 행동했다면 큰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 그 때의 내 모습이 싫어. 그 땐 너무 마음에 여유가 없었나봐. 지금까지 부끄러워서 자기에게 말할 수가 없었어. 자기의 관점을 듣고 나니까 마음이 편하다."


남편도 나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과거가 있다는 살이 놀라웠다. 남편은 (나보다는) 자기애가 큰 편이다. 절도 같은 범죄 행위를 했다면 모를까 남편은 그런 인간관계에소의 소소한 일 정도로는 이불킥을 할 것 같진 않은데. 몰랐던 모습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원래 계획했던,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그" 이야기가 아니라, 그 순간 갑자기  떠오른 8년 전의 잘못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너무 부끄러워서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다.


나와 함께 일하던 같은 과 직원 A가 내게 간절히 도움을 청한 일이 있었다. 나는 스무 살 정도 어린, 그의 상사였다. 그 분의 향후 진로와 관련된 일이었다. 나는 그 분의 꿈을 응원해주고 싶었지만, 왠지 예민한 사안일 것 같았다. A는 지원서 작성이든 주변 사람을 설득하는 과정이든 내 도움을 지속적으로 요청했다. 나는 상사들에게 시시각각 상황 보고를 했는데, 상사들은 딱히 말리지도 지원해주지도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A가 원하는 자리를 다른 사람들도 원하게 되면서 경쟁이 격해졌다. 그는 나 없이는 본인이 할 수 없다며, 나에게 끝없이 도움을 요청했고 나는 한창 유학준비와 그의 공백으로 인한 업무 처리로 바쁘던 때라  힘들었다.


한 번은 A가 자신의 임용을 반대하는 사람과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다. A는 그 자리가 부담스럽고 무섭다면서 내가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하필 바로 다음 날에 토플을 봐야해서 도저히 어려울 것 같다고 이야기했지만, A는 재차 삼차 부탁을 했다.



그런데 내가 자리에 동석을 한 사건크게 기사화가 되고 말았다.







기사의 내용은 우리 부처가 조직적으로 어느 기관에 갑질을 하고 있는데, 나의 동석이 그 증거라는 것이었다. 사실은 아니었다. 우리 부처는 A의 행보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나'라는 존재가 그 연결고리를 제공했던 것이다. 기사에 실명이 나오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정황을 아는 사람은 누구라도 나 임을 알 수 있도록 특정이 되어 있었다.


기사화가 되기 전 담당 기자가 나에게 전화를 했었다. 내가 윤리적으로 엄청난 위반행위를 한 것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으니, 빨리 상부의 압력을 상세히 말하라것이었다. 나는 "상부의 압력은 없었다"라고 했고 "그러면 그 자리에 왜 갔냐"라는 질문에 딱히 답을 하지 못했다.


그 전화를 받은 날부터 고통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기사는 나에 대해 날선 기조로 나왔다.

국회 요구자료가 빗발치고 후속 기사가 쏟아졌다.


부처에는 삽시간에 소문이 돌았다.

저 사람이래, 저 사람이래.


왜 나는 이 문제가 공론화되었을 때 온 부처에 피해를 입히리란 사실을 예견하지 못했던가? 나의 동석이 그렇게 무게감이 있는 행위라는 것을 왜 몰랐던가?


나는 공무원이기에 기자에게 떳떳하게 내 입장을 밝힐 수 없었고, 의원실을 다니면서도 상사들과 함께 머리를 조아리며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말하고, 부처 내에서 사람들이 수근수근 거릴 때 땅을 보며 다녀야 했다. 나를 혼내거나 탓하지 않는 상사들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웠다.

또 어떤 후속기사가 나올까.



국정감사가 코 앞이라는 것이 저주스러웠다.

안 그래도 바쁜 우리 과가 나 때문에 야근을 해야 되는 것이 미안했다.


"너희 과 덕분에 이번 국감은 편하게 넘어가겠다."는 장난스러운 소리가 아프게 박혔다.


몇일이 흘러 국정감사 당일이 되었다.






놀랍게도 아무 국회의원도 이 일에 대해서 질의하지 않았다.


기자들도 더 이상 기사를 쓰지 않았다.


A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부처에서 조용히 다시 근무를 시작했다.

나에 대한 소문도 금세 잦아들었다.


그렇게 지나갔다. 내 일인데도, 나는 일의 시작과 끝을 바라보며 무력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나갔다.

내 일인데도, 나는 일의 시작과 끝을 바라보며 무력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A의 욕심이 과했다고 했다. 꿈도 못 꿀 자리를 꿈꿔서 무덤을 팠다고. 나는 그런 평가가 꿈을 이루지 못했기에, 사후적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꿈을 꾸던 당시에 그것이 꿈인지 욕심인지 알 수 있을까.





남편이 내게 물었다.

"그래서 네가 거기서 잘못한 게 뭐야?"

"기사가 났을 때 스스로 방어도 못할 거면서 미리 신중하게 행동하지 못한거지."

"말도 안돼. 정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동료직원이 부탁을 하고 상사들도 별 말을 안하는데 어떻게 그 위험을 미리 알 수가 있겠어? 내가 보기엔 자기를 이용한 그 A가 제일 나빠. 그 사람, 그 이후에 당신한테 사과했어?"

"아니."

"그럼 둘이 어떻게 지냈어?"

"그냥 잘 지냈지.."

"어떻게 자기를 위험에 빠뜨린 사람과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가 있어?"

"그 분도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몰랐겠지.. 그리고 그 분은 나보다 욕 먹고 더 힘들었으니까. 인생에 한 번 오는 기회라고 생각해서 절박했을거야. 난 그 마음 이해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절대 위험을 모르지 않았을걸. 그냥 자기를 방패막이로 쓴 거야. 혼자 힘으로는 안될 것 같고, 자기는 본인에게 공감을 해주고 있는데다가 평판이 좋고 직급도 높으니 이용한 거라고. 본인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자기보다 경력이 훨씬 긴데 그걸 몰랐겠어?본인이야 원해서 하는 거지만, 자기를 끌고 다니면 자기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는 걸 몰랐겠냐고. 자기가 싫다고 몇 번 이야기한 거, 자기 성격에 할 만큼 한 거야. 더 이상 어떻게 해. 그럼 부처 사람들에게도 자기가 거절했는데 그 사람이 계속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거나 이야기 안했어?"

"안 했지. 그런 이야기를 뭐하러 해."

"아휴. 그 사람은 자기를 이용하는데, 자기는 그 사람을 감쌌구나. 난 진짜 이해가 안된다. 정치적인 판단을 미리 해주지 않은 상사들이 자기를 혼내지 않은 것도 당연한 거고. 그 사람들에게도 막 고마워할 필요는 없는 거 같은데."

"그래도 내가 판단을 잘 했다면 상사들도 피해를 안 봤겠지."

"아니야. 진짜 아니야. 난 다 보이는데, 그게 자기 눈엔 안 보여? 이제 그 문제로 자책하지 마."







이 문제가 터졌을 때 매일 아침 일어나면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아- 더러운 꿈이네, 하고 박차고 일어날 것 같은 꿈인데, 사실은 현실.


오늘 남편이 새로운 시각을 꺼내기까지, 난 A를 탓해본 적이 없었다. 나이는 훨씬 어리지만 내가 상사니까 내가 판단을 잘 했어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그 분이 나를 이용했다는 생각은 정말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남편의 말을 듣고나니, 얼핏 그 분이 했던 행동 중 이상했던 파편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분은 위험 부담을 알면서도 자신의 꿈을 위해 달려가고 있었고 거기에 나를 끼워넣었고 그러다 내가 만신창이가 되었는데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안의 중대성이 어느 정도인지 판단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선배 공무원들은 "그 정도 기사는 지나가는 일이지."라고 웃어 넘겼고, 후배 공무원들은 "큰일났어요!! 어떡해요!!"라고 했다. 어떤 선배 공무원들은 알듯말듯 농담을 했는데, 그게 나를 탓하는 것인지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국회의원 중 누군가가 이 사안에 열정을 느끼면 큰 일이 되는 것이고, 그 기자가 계속 나를 저격하면 큰 일이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물은 엎질러졌고, 물이 홍수처럼 넘쳐 흐를지 똑똑 떨어지고 말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수동성이 너무나 싫었다.



당시 함께 살던 가족들에게 이 일은 비밀로 했었다. 가족들이 기사와 댓글을 뒤지면서 나를 걱정할까봐 무서웠다. 이 아픔은 나 하나로 족했다.


그 일은 유학결심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난 정무적 감각이 없으니까. 똥인지 된장인지 판단할 줄 모르고, 무턱대고 온정적이니까. 공직의 무게를 견디기에 알맞지 않아.



남편은 내 성격과 주변 캐릭터들의 성향을 고려해보건대 "너무 큰 똥이어서 가장자리라도 밟을 수밖에 없었던 똥이야. 재수가 없었던 거라고." 상황을 정리하곤 잠이 들었다.






남편도 나도 서로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 있었다. 둘 다 자신의 과오를 확대해서 기억하고 한참이 지난 오늘까지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남편의 시각을 듣고나니 큰 그림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책임이 눈에 보였다. 그의 말처럼 내가 A에게 악의적으로 이용당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 모든 일이 오롯이 나만의 책임은 아니었던 것 같다.





 머릿 속에서 A는 '어려운 꿈을 좇다 스러진 불쌍한 이', 상사들은 '나 때문에 고난을 겪고도 나를 혼내지 않은 관대한 이'들로 기억이 남았다.



한편 나는 '정무적 판단도 못한 채 온정적으로 행동하다 주변에 크게 폐를 끼친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톨릭 교회에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옵니다.'를 외우던 것 때문인지, 남을 탓하기 전에 나를 먼저 돌아보라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 때문인지.



남편이 내게 말했다.


자기 잘못이 있음에도 100% 남 탓만 하는 사람들도 파괴적이지만, 100% 자기 탓만 하는 것도 만만치않게 파괴적이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 가치를 조화시키는지 궁금하다.


남의 잘못을 보기 전에 내 잘못을 먼저 돌아볼 것.


그러면서도 모든 결과를 나만의 탓으로 환원하지 않을 것.



어떻게 해야 건강한 밸런스를 찾을 수 있을까?




남편이 잠들고 난 후에도 난 한참 동안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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