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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Jul 18. 2023

실패가 없다면 먼 훗날의 성공도 없다

미국 대학원생이 되고 나서 새롭게 두뇌에 장착된 단어: 리젝션(rejection). 

한국에서도 내가 이렇게 거절을 많이 당했던가? 

아, 대학도 떨어지고 행시도 떨어졌었지. 갤러리에서 해고도 되었었지. 

그런데 왜 이렇게 거절이 마음이 아플까? 왜 그 마음아픔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걸까? 


내가 존경하는 친구 최다혜 님이 쓴 책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내가 배운 것들'의 첫 번째 챕터는 '가장 먼저 부탁하는 법을 배우다'이다. 누군가에 부탁하는 것은 타인에게 부담을 주고 민폐를 끼치는 일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내가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그것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야 기회가 열린다. 


잘 부탁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거절을 안당하면 가장 좋겠지만, 거절을 당해도 캔디처럼 훌훌 털고 일어나는 힘을 갖고 싶다. 

아침에 거절을 당해도, 오후에 맑은 얼굴로 다른 이에게 새로운 부탁을 할 수 있는 힘. 

거절의 경험에서 배울 점을 찾아내며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어. 많이 배웠어. 뜻깊었어."라고 되새기는 마음. 



거절에 지치고 지친 2023년 오늘, 가장 힘든 거절이 무엇이었나 기억을 톺아본다. 



2020년 봄, 내가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던 시기였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더 어려워질 곳이 없다고 생각했던 어머니 사업이 더 어려워졌다. 나는 장학금과 저축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모두 마련해두고 유학을 왔는데, 어머니께서 급한 마음에 내 명의의 저축을 사용하시고 신용대출까지 받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늘이 무너졌다. 기숙사에는 나 뿐이었다. 코로나가 시작된 후 룸메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텅 빈 4인실 기숙사에서 며칠을 혼자 지칠 때까지 울었다. 


나 여기 오기까지 정말 열심히 했는데. 정말, 정말 열심히 했는데. 


지도교수님께 휴학을 하고 복직을 하든,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는 학비만도 빠듯하고, 직장에서 매달 생활비가 얼마 간 들어왔지만, 비싼 시애틀의 렌트비를 감당할 순 없었다. 내 저축 없이 생활이 불가능했다. 공무원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겸직허가를 받지 않고서는 알바 등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신용대출 이자를 어떻게 내야 할지. 머리가 아파왔다. 


지도교수님은 분명히 방법이 있을 거라며 본인이 최대한 도와주겠다고 비행기표를 일단 끊지 말아 달라고 말씀을 하셨다. 교수님은 70대 노인이셔서 연구비는 없으셨고, 가난한 학생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찾아서 보내주셨다. 외국인 학생은 당시 연방 정부에서 지원하는 코로나 Stimulus check을 받을 요건은 안되었고, 우리 학교와 여러 비영리재단에서 이따금씩 250불~1,000불 정도 되는 aid를 받을 수 있었다. 예전 같으면, 신청서 쓰는 시간이 아까워서 하지 않았을텐데 그렇게 돈이 궁할 때는 온종일을 신청서에 바쳤다. 눈에 불을 켜고 돈을 준다는 곳만 찾아보고 있었다. 이러려고 유학을 왔나 허탈한 기분도 들었다. 


당시 남자친구가 내 생활비를 지원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한 달 내 장학금 신청서를 쓰고 있는 나를 보며, 그거 쓸 시간에 논문을 써서 이름 알릴 생각부터 하라는 것이다. 내가 아주 어렸거나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면 제안을 받아들였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돈을 언제 갚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던 나는, 끝끝내 남자친구의 제안을 거절했고, 장학금 신청서에만 올인하던 나를 바라보던 남자친구는 결국 헤어짐을 선언했다. 그 때 <Scarcity>라는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가난한 사람의 가난한 마음이 사람을 얼마나 무능하게 만드는지에 관한 책. 나의 무능이 내 탓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그러다가 TA (강의조교)나 RA (연구조교)처럼 교내에서 일을 하면 학비가 전액 지원되고 매달 2,000불 정도의 생활비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 마이 갓! 내가 속한 로스쿨은 학부가 없어서 TA, RA 제도가 없었고 타 학과 학생이 TA, RA를 할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었다. 이따금 대학원생이 부족한 학과에서 TA, RA 채용 공고가 났다. 공고는 하나의 사이트에서 통일적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학과 홈페이지, 학교 홈페이지, 이메일 같은 식으로 여기저기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샅샅이 뒤져보니 당시 20개 정도 내가 지원할 만한 자리가 나 있는 것을 확인했다. 


(겨우) TA인데도 자기소개서, 커버레터, 교수님 추천서 3종, 심지어 모의 강의 동영상까지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20개 지원서를 쓰는 데에 몇 날 몇 일이 걸렸는지. 지도교수님에게 얼마나 여러 번 추천서를 부탁드렸던지. 그 때는 영어도 잘 못하던 때여서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물어가며 문법을 고쳤다. 미국인들은 내 커버레터가 너무 장황하고 겸손하다는 피드백을 줬다. 간략하게 내 자랑을 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싸매고 문장들과 씨름을 했다. 나는 대한민국의 사무관으로 1,000억원의 예산 사업을 만들던 사람인데, 이런 경험이 TA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연결할 수 있을까? 


이내 리젝션 레터가 이어졌다. "Decision"이라는 말이 제목에 들어있으면 보통 거절이라는 것을, "I appreciate your interest ..." 어쩌고 고맙다는 말로 시작하는 문장은 "We regret to inform you that ..."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예 답을 하지 않는 곳도 많았다. 어느 한 학과는 떨어뜨려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1자리에 240명이 지원했다."라는 위로성 문구를 덧붙였다. 교내 일자리에 240명이 지원했다고? 레알이니?? 한편으로 내가 아주 열등해서 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위안이 들었다. 


그러다가 딱 한 곳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다. Safecampus advocate이라는 자리였는데, 교수와 대학원생들에게 교내 성폭력 방지에 대한 강의를 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내가 교내 성폭력에 대해 아는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치만, 문과가 지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었고 로스쿨 출신이라는 강점 때문인지 최종 인터뷰까지 갔다. 당시 3명이 인터뷰를 본다고 했다. 인터뷰 때는 모의 sexual harrassment 강의 자료(30분)를 준비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아뿔싸. 워싱턴 주의 sexual harrassment 관련 법규와 Title 9 등 분쟁해결 절차를 공부해서 자료를 얼기설기 만들었다. 영어 스피킹에도 문제가 많았기에 스크립트도 만들었다. 온 몸에 땀을 흘리며 Zoom으로 인터뷰를 보았다. 다들 박수를 치고 재밌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불합격 메일을 받았다. 


당연히 합격일 줄 알았는데. 그것만 합격했다면 내년 등록금과 생활비 모두 해결인데. 그 날 아마 내 숨겨진 신용대출을 확인한 날보다 더 많이 슬펐다. 내 영어 때문일까? 예민한 주제를 강의하는데 내가 단어를 잘못 발음하면 괜히 문제가 될까봐 원어민을 채용했을까? 너무 법률 중심으로 강연 주제를 만들었나? 


내가 너무 슬퍼하자 친구가 내게 물었다. "그게 네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자리 맞니...? 네가 성폭력 관련 법을 하는 건 아니니까, 잘된 걸 수도 있어." 그 친구는 학과에서 RA를 하고 있는 친구였다. 내가 하고 싶은 분야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자리가 내게 줄 경제적 안정감. 그게 너무도 필요했다.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거절을 겪었다. 코로나로 일자리가 동결되면서 모든 학생들이 교내 일자리를 지원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신 한국에 있는 교수님들이 많이 챙겨주셨다. 비영리 저작활동을 하는 것은 공무원 신분으로도 겸직허가를 받을 수 있었기에, 연구과제에 참여해서 보고서를 쓰고 대가를 받았다. 법제연구원 등에서 요청하는 법률 번역도 했다. 그 때 EU AI Act를 번역한 덕에 지금까지도 AI Act의 조문은 어느 정도 생생하게 꿰고 있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생활비를 간신히 맞추었다. 내가 얼마 간 모은 돈에, 여동생이 보태준 돈을 더해서 고금리 신용대출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10개월 간 지원한 끝에 최초로 2020년 12월 합격통보를 받게 된다. 2021년 3-6월, 한국어학과에서 TA로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TA는 채점만 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대형 강의의 섹션 하나를 맡아서 주3일 강의를 해야 하는 업무였다. 어쩔 수 없이 영어 speaking을 해야 했다.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다행히 맘씨 좋은 학생들 덕에 금세 적응을 했다. 그 때 강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덕에 2023년에는 로스쿨에서 강의를 요청받았을 때 선뜻 수락할 수 있었다.  


2021년에는 총 3곳의 교내 일자리에서 오퍼를 받았다. 한국어학과(TA), 법사회학과(TA), 그리고 컴퓨터사이언스학과(RA). 컴퓨터사이언스 학과의 조건이 가장 좋고 내가 연구하는 분야와 맞았기 때문에,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 곳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받고 있다. 



그래, 첫 번째 거절을 다스리는 법은 이거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 실패는 시도를 의미하므로, 실패가 없다면 먼 훗날의 성공도 없다. 끝끝내 실패를 하다가 결국 한 두 번 성공해내고야 마는 기억. 그 기억을 쌓아가는 것이 거절 회복탄력성을 기르는, 가장 기초 중의 기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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