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예쁜 그림 한 장 - 손 그림 일러스트
고등학교 시절 미술 시간에 잘 생긴, 아닌 그리 잘생겼다기보다는 훈남이었던 미술 교생 선생님이 잠깐 우리를 가르치셨던 적이 있었다. 소묘를 배우던 시간이라 각자 책상 위에 사물을 올려놓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는데 나는 운동화를 그렸다.(반 전체가 모두 운동화를 그렸는지, 각자 자기가 정한 물건을 그렸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평소 손재주가 있었던 나는 내가 보기에도 꽤 괜찮은 스케치를 했고 교생 선생님께서는 정말 잘 그렸다며 반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칭찬해 주셨다. 그래서 으쓱해진 마음에 집에 와서 그 그림을 엄마께 내밀었다. 그러자 엄마는 그림을 보자마자 '그러게 너한테 미술 공부를 조금이라도 시켰었으면... 다른 엄마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너 미술 시키라고 했었는데...'하며 씁쓸해하셨다.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그리기에 소질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초등학교 복도에 액자에 넣은 내 그림이 걸리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그리 넉넉지 않은 살림에, 큰집이라고 항상 북적이는 식구들에,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작은 집 식구들까지 거의 함께 살다시피 했으니까) 우리 엄마는 나를 공부와 직접 관련이 없는 미술까지 학원에 보낼 수는 없는 처지였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 다녔던 학원들도 다 내가 가고 싶다고 엄마한테 조르고 졸라서 몇 개월을 기다린 후(아마 내가 모를 엄마의 준비 과정이 숨어있었겠지.... 내가 엄마가 되니 엄마의 젊었을 적 행동들이 다 이해가 간다.) 다녔었던 것 같다. 당시 미술은 집안에 여유가 있는 아이들이나 할 수 있는 돈 많이 드는 예술 장르였었다. 물감이며 붓이며 스케치북이며 그림을 공부하는 아이들이 쓰는 것들은 하나같이 내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브랜드의 생각지도 못한 고가의 가격이었다. 그래서 난 수채화 팔레트에 그 비싼 물감을 하나씩 다 짜 놓고 그것들을 마구 배합해서 쓰는 그들의 배포가 무척이나 부럽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했다. 난 싸구려 물감도 아까워서 조금씩 짜서 쓰는데....^^
하지만 한 번도 미술을 배우지 못해 안타깝다거나 슬프다거나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냥 나의 생각에 미술은 '나와 관계없는 어떤 것'이라고 이미 재단을 내렸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이 재능의 문제이든 재력의 문제이든(갑자기 재력의 문제라고 생각하니 슬퍼지는 걸....^^). 내 그림을 보신 엄마의 반응을 보곤 '아, 엄마한테 미술은 아픈 부분이구나.'라는 생각에 그 뒤로는 한 번도 내 그림을 보여드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는 내가 커서 돈을 벌면 내 돈으로 미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 그 장면에서 그런 생각으로 이어졌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내 스스로 미술을 배우면 엄마가 나한테 덜 미안해할 것 같았다.^^
사설이 길어졌다.^^ 어쨌든 그런 이야기가 있는 탓인지 난 그림 그리기 책에 탐닉한다. 일러스트에서 여행 그림 그리기, 수채화, 팝아트...... 조금이라도 새로운 기법이라든지 예쁜 그림이 눈에 띄면 사들여야 직성이 풀린다. 매번 쌓여만 가는 그림책들에 이제는 사지 않고 이것만 열심히 그려보리라 다짐하지만 또 새책을 주문하곤 '엄만 책만 쌓아놓는 거야!'라는 아이들의 질책에 어쩔 줄 몰라한다. 이번에는 중국이라 직접 책은 주문 못하고 Ebook으로 주문해서 새로 읽은 책이 바로 '작고 예쁜 그림 한 장 - 손 그림 일러스트' 민미레터 지음, 큐리어스 출판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게 만든다는 점이다.^^ 미술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좌절하는 것이 그림 그리기의 스케치 단계일 것이다.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연필을 대면 댈수록 내가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물이 되어버리는지.... 채색 단계에까지는 가보지도 못하고 스케치만 했다 지웠다 반복해 그림은 없고 시커먼 종이만 남게 되는 것.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런 스케치 단계 없이 물과 물감 만으로 수채화를 그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설명하는 기법도 몇 가지 안 된다. 그럼에도 근사한 작품들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얼른 나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품게 만든다.^^
그러나 결과물은...... 역시나 아무나 그린다고 책에 있는 그림처럼 나오면 다들 작가나 화가를 하고 있겠지.... 그래도 분위기는 대충 비슷하게 나왔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틀에 박혀 있는 완벽한 그림보다 어딘지 서툴러도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는 그림이 더 의미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아, 그래도 그림 공부는 열심히, 더 많이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