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마루 May 16. 2016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 세상 살아가기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이기호, 마음산책

    중국에 오니 종이로 된 한국 책을 접하기가 힘들다. 한국에선 집에 가장 많이 널려있는 게 책이었는데..... 그동안의 살림살이 다 정리하고 짐이라곤 캐리어 몇 개랑 부친 짐 몇 개로 달랑 넘어왔기에. 짐 정리하면서 무얼 그리 바리바리 싸들고 살았나 반성하기도 했고 이를 계기로 버리는 삶을 실천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정말 소박하게 살 거다 다짐하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살림살이를 마련할 때에도 지극히 소박하게 하리라 마음먹었었다. 도미니크 로로의 [지극히 적게]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쉽게 마음먹지 못했던 것을 몸으로 체감하며 결심할 수 있었다.

    짐을 정리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중국에 가지고 갈 책을 고르는 것이었다. 수천 권의 책 중에서 달랑 10권 이내(내가 정한 기준. 내 캐리어에 넣어서 끌고 다닐 수 있는 무게의 한도라고 생각함)를 고르는 일은 너무나도 고역이었다. 고르다 보니 시나 소설보다는 실용서 위주가 되어 버렸다. 이제 전업주부가 되어야 할 테니 살림에 대한 책 2권, 내가 탐닉하는 그리기 관련 책 3권, 캘리그래피 책 2권, 사놓고 읽지 못한 시 에세이 1권. 나머지 2권을 소설에서 고르고 고르다 포기하고 전자책으로 다운받을 수 있는 건  모두 다운로드하여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까닭에 중국 와서 [시를 잊은 그대에게]를 끝내고 나니 더 이상 읽을 종이 책이 없다. 마음 간사하게도 더 이상 읽을 책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종이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내가 중국서 책을 안 읽는 이유도 다 종이책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 핑계까지 대며. 책을 사고 싶었다. 그것도 신간으로, 소설이면 더욱 좋고!


     한국 vpn을 사용하여 도서상품권을 한 장씩 컬처랜드에 입력한 뒤 드디어 인터파크도서에서 책을 고를 수 있었다. 흐흐흐흐하하. 역시 쇼핑 중 젤 재밌는 것이 책 쇼핑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에 봉착. 최대한 고르고 골라 엄선해서 사야 한다. 붙는 배송비가 장난 아니다. 한국의 무료배송이 너무도 그립구나. 더군다나 이번에는 동생에게 생필품 보낼 때 같이 보내달라고 부탁할 것이라 더욱 그렇다. 크기가 커지면 동생이 부치기도 힘들고 배송비도 많아질 테니...... 우선 큰딸 공부하는 데 필요하다는 참고서 1권, 그리고 작은 딸이 3월부터 노래했던 52층 나무집 1권, 그리고 나머지 내가 고를 수 있는 건 달랑 1권. 신랑은? 불쌍하지만 모른 척하기로. 우선 읽고 싶은 신간들을 고르고 고른 뒤에 그중 전자책으로 출시된 것은 아쉬워도 전자책으로 구입하기로 했다. 내가 고른 책 중 전자책이 출간되지 않은 책은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사노 요코, 서혜영 역, 을유문화사였다. 그래서 결국 종이책 말고 전자책으로 읽게 된 소설이 바로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이다.


   몇 년 전 이기호의 소설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를 아무 생각 없이 학교 도서관에서 집어 읽고서 이 작가의 팬이 되어버렸다. 딱 내 연령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그 속에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세상살이의 찌질함, 그 찌질함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작가의 글솜씨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이 작가의 신간소설을 보고는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걸 무슨 소설이라고 해야 하나? 단편보다도 짧은 소설. 엽편소설(葉篇小說 : 나뭇잎 판 장에 다 쓸 수도 있을 법한 짧은 소설)? 박완서 작가의 [세 가지 소원]을 읽었었나,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짧은 소설로는 2번째 읽게 되는 소설집이었다.


     길이는 짧아졌으나 역시 찌질함과 그것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매력은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 40여 편의 이야기가 실려있었다. 작가란 역시 대단하구나. 이 많은 이야기들이 작가의 머리 속에서 다 나왔다니. 우리들도 흔히 접하고 지나가는 생활 속 찰나들이 이야기 하나로 완성되어 눈 앞에서 생생히 재현되는 느낌이랄까?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과 땀에서 배우라는 말,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점점 무표정하게 변해갔고, 결국은 지금 준수가 짓고 있는 저 표정, 그것이 평상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나도 눈높이를 좀 낮추고 취업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 된 게 이놈의 나라는 한번 눈높이를 낮추면 영원히 그 눈높이에 맞춰 살아야만 했다. 그게 먼저 졸업한 선배들의 가르침이었다. 내 땀과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의 땀의 무게가 다른 나라, 설령 눈높이를 낮춰 취업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월급에서 학자금 융자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나라......                                                                '낮은 곳으로 임하라'

     아무렇지 않아야 할 상황이 절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삶으로 다가오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살아내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바로 그렇다. 눈높이를 낮춰 취업하고 싶지만 한 번 낮춘 눈높이는 절대 다시 높아질 수 없는 시대. 그 눈높이에 따라 흘리는 땀의 무게 조차 다르게 평가되는 시대. 그런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냥 별일 없는 것처럼 사는 수밖에...... 거의 십 년만에 여자와 단둘이 만나 게 된 주인공이 등장하는 '그녀와 마주한 어느 오후'에서도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연히 잘못 걸려 온 여자의 상냥한 목소리에 몇 년째 백수로 시간을 흘려보내던 주인공 김상호는 보험설계사인 그녀와 만날 약속을 한다. 커피숍에 먼저 와 있는 그녀를 보곤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는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그녀의 사연을 듣게 된다. 그리고는 들어가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으로 끝나는 이 이야기에서 잘못 걸려온 전화 임을 알면서도 젊은 여자의 상냥한 소리에 사람이 그립고,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에 덜컥 약속을 해 버리는 주인공, 그 약속 때문에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젊은 여자. 다음엔 약속을 꼭 지키겠다고 아이와 약속하지만 우리는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리란 걸 알기에 가슴이 먹먹하다.


    또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다양한 가족들의 모습도 나타난다. 남편의 SNS 중독에 대한 고민 상담 내용으로 이루어진 '내 남편의 이중생활'에선 실제 생활보다, SNS에서나 가능한 가상 삶에 빠져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유머스럽게 그려져 있다. 어머니가 기르던 죽은 강아지 봉순이를 묻어주는 이야기인 '우리에겐 일 년 누군가에겐 칠 년'에서는 기르는 강아지보다 못하게 된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또한 '제사 전야'에선 오랜만에 제사 때문에(할머니의 죽겠다는 협박에 의한 게 더 크지만) 모여 결국을 싸움을 하곤 다들 돌아가려는 가족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할머니의 비밀을 이야기한다.


"지금은 가지 마세요. 할머니가 내일 죽는다고 했어요. 그거 보고 가세요."
신발을 신던 작은아버지와 고모부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내일이 할아버지 제사니까. 할머니가 그때 죽는다고 했거든요. 그래야 제사도 한 번에 지낼 수 있다고. 자식들 두 번 걸음 안 시킨다고."
                             제사 전야


     '불 켜지는 순간들'에서는 죽은 뒤 가게 된 저승에서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불이 들어오지 않자 왜 불을 안 켜주는 벌을 주는 거냐고 묻는 주인공에게 저승사자는 주인공이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갔던 그 주기에 한 번 불이 켜짐을 알려준다. 어머니 마음에도 딱 그때 한 번씩 불이 켜졌었다며. 이런! 나도 가슴 한 구석이 찔렸다. 멀리 왔다고 모른 척하지 말고 전화라도 자주 드려야겠다.^^


     밤이면 매번 쿵쾅거리는 윗집에 항의하기 위해 큰 맘먹고 올라간(윗집 남자의 커다란 덩치 때문에) 민수는 그 남자의 완력에 질질 끌려 그 집 안으로 들어간다.

"제가 평생 운동만 해서...... 숫기가 좀 없거든요. 진작 말씀드린다는 게......"
민수는 남자의 말을 듣는 중 마는 둥, 할머니 앞에서 최선을 다해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는 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1302호 남자의 아들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밝은 표정이었다. 민수는 말없이 그 아이의 표정을 따라 지으며 자신의 딸 또한 저런 표정으로 자라나길 속으로 바라보았다.                                                                                                    한밤의 뜀박질

     자신을 죽은 할아버지로 착각하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위해 밤마다 할머니와 함께 뜀박질을 해주는 손자. 이런 사소하지만 절대 작지 않은 배려 덕분에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없는 세상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겠지.


     역시 이기호의 소설은 재밌다. 어렵고 무거운 이야기들을 재치 있고 유머스럽게 표현해 마지막에는 가슴을 팍치는 반전으로 사람을 먹먹하게 만든다. 특히나 이번 소설집은 짤막짤막한 이야기여서 글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한 편씩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잠자기 전에 한 편씩 야금야금 꺼내 읽는 것도 참으로 행복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엄마의 한풀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