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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마루 Apr 06. 2016

공대녀라 불리는 문과 여자의 시 읽기

[시를 잊은 그대에게]-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 / 정재찬 지음

     국어교사를 하면서도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말하기이다. 여느 여자들처럼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떠는 일이 나는 제일 힘들다. 특히나 낯선 자리, 낯선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수업은 어떻게 하지? 곰곰 생각해보니 내가 모든 말하기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어려워하는 말하기는 나 자신의 감정표현이라든가, 그냥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아주 일상적인 말하기 분야였다. 그래서 평소 말이 없다는 소리를 달고 다니는 것이겠고. 말이 없는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그런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참는 것이 절대 아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나에게 말을 시켜보겠다고, 그것이 나에 대한 배려라 생각하고 자꾸 말을 거는데, 그것이 나한테는 정말 고역이다. 나는 듣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겁고, 이미 그 자리를 즐기고 있으며(즐겁지 않으면 어떻게든 빠져나왔겠지), 말을 참는 게 아니라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것일 뿐이다.


     중국어 학원을 다니게 되면서 1주일에 한 번씩 실습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후식으로 커피를 마신다. 한 달 정도가 지난 이제야 좀 얼굴이 익어 인사도 하고 자기 이야기도 조금씩 하고 그런다. 물론 다른 사람들끼리는 훨씬 많이 친해진 것 같지만 난 이게 최선이다. 다들 중국에 온 지 한 달에서 길어야 6개월 정도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로서로 관심이 많다. 가끔 그 관심이 나에게 쏟아질 때가 있다. '내가 뭐하는 사람일까?'가 공통 관심이 됐을 때, 디자이너라든지, 예술가라든지(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고 그 전에도 가끔 들어 봤던 소리였다), 그러다 나온 소리, 양 쪽에 후배들 거느리고 다니던 공대 여자!(마시던 커피 뿜을 뻔했다) 내가 많이 무심해 보이고 털털해 보이기는 한다지만 그래도 나 문과 나온 여자, 그것도 국어교육, 문학과 관련 있는 문학소녀였는데.... 어쩌다 이 지경까지..... 나의 이 아름답고 세심한 감성을 뒤집어 까 보여줄 수도 없고. 읽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읽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란 부제가 왠지 눈에 밟힌다. 이래서 나한테 더 절절히 다가왔을까? 아냐. 난 문학소녀라고!


남이 울면 따라 우는 것이 공명이다.
남의 고통이 갖는 진동수에
내가 가까이하면 할수록 커지는 것이 공명인 것이다.
슬퍼할 줄 알면 희망이 있다.
                                          ------   눈물은 왜 짠가, p82

      이 책은 한양대학교의 문, 이과 통합 교육의 일환인 '융복합 교양 강좌' 중 이공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시 읽기 강좌, 정재찬 교수의 '문화 혼융의 시 읽기' 강의의 내용을 바탕으로 집필한 시 에세이이다. 이공계 학생들이 대상이라 게재된 시들이 다들 한 번씩은 들어보았을 만한 유명한 시들이다. 물론 나도 아이들에게 열심히 가르쳤던 시들이고. 나는 아이들에게 무어라 가르쳤던가? 시험에 나올만한 것들만 앵무새처럼 열심히 주입시켰던 것은 아니었던가? 내가 가르친 시를 읽으며 나의 아이들은 시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을까? 이 책을 읽으며 어쩔 수 없이 나의 가르침의 방법과 정재찬 교수의 방법을 비교해 볼 수밖에 없었고, 너무나 쉬운 언어로 너무나 적확하게 물 흐르듯 흘러가는 그의 강의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가난은 슬픔이고 슬픔은 고통이다. 그것이 가장 기초적인 진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짐짓 외면한다. 현란하게 돌아가는 자본과 상품과 정보와 일상 속에서,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없다는 이유로, 간단히 그들의 가난에 등을 돌린다. 그리하여 때로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는 거라 말하면서도 그 피할 수 없는 게 왜 하필 그들이고 왜 당신은 아니냐는 질문에는 슬쩍 답을 피해 간다. 빈부격차를 해소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나라가 당신의 세금을 조금이라도 올리는 날이면 당장에 흥분을 한다. 자기한테 세금의 혜택이 돌아오는 것은 공평한 일이고 자기 돈이 타인의 혜택으로 돌아가면 불공평하다고 여기기 일쑤다. 더 가공할 일은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시선, 곧 무관심이다. 그것은 또 다른 가난, 곧 마음의 가난이다.
                                                  ------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 p90

     70, 80년대 시에서 등장하는 소시민성이라는 용어에 대한 이 얼마나 적확하고 구체적인 설명일까?  '속물근성, 비겁함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는 체제나 사회를 바꿔보려는 개혁의지도 없으며 그저 현재 상황에 안주한 채 비겁하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뜬구름 잡는 추상적인 설명보다는.


그러니 소월의 한을 집단적 전통이나 식민지 민중의 심정과 기계적으로 결부 짓곤 하는 상투적인 해석과 이젠 결별하자. 그의 한은 사무치게 개인적이다. 그것은 또한 관념이 아니다. 시에 담긴 그의 처절한 삶. 그 한의 질과 농도에 유념해 귀를 기울여 보라. '아버지'는 아버지이되, '부모'가 될 수 없었던 이를 아버지로 두었던 소월의 상처를 아프게 바라봐 주고, 시를 통해 흘러나오는 그의 신음을 공감하며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가 시인에게 먼저 베풀어야 할 도리가 아닐까? 그런 연후에 그에게 '민족 시인'이라는 월계관을 씌어 드리자. 부를 상실한 그의 한이 국가라는 어버이를 잃은 우리 민족의 한과 통하였으니
                                                                   ------   아버지의 이름으로, p201

     엄마와 누나만을 줄기차게 노래한 소월의 시를 읽으며, 그 여리디 여린 여성의 한 맺힌 노래 가락을 어쩜 나는 한 올의 의심도 없이 민족의 한이라 굳게 믿고 있었을까? 한 번도 그것을 일본인들에게 맞아 정신이상을 보여 사람 구실을 못하던 아버지 대신 집안의 모든 기대와 의지를 받아내야 했던 시인 개인적인 삶과 연관 지어 볼 생각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까? 김소월의 삶엔 아버지가 없었고, 아버지가 없는 그의 삶이란 어린 나이부터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주어진 삶에 순응하는 것이었다. <부모>에 어머니만 있고 아버지는 없으며 심지어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고 노래하고 있건만 그걸 민족의 한을 노래한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던 건, 그건 내가 너무도 당연하게 김소월 하면 민족의 한을 노래한 시인이라 배웠고 또 너무도 당연하게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리라. 모든 시가 개인의 감정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김소월은 개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주입식 교육의 소산일 것이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이영도, <무제 1>
                          ------     어쩌란 말이냐, 흩어진 이 마음을, p228

     '깃발'로 유명한 청마 유치환 시인의 애달픈 사랑의 대상이었던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가 3년이 넘도록 날마다 배달되는 청마의 편지와 시편에 드디어 마음이 움직인 후 쓴 시이다. 유부남이었던 청마와 남편을 사별하고 딸 하나를 키우며 살던 정운의 사랑이 흔히 말하는 로맨스였는지 불륜이었는지는 누구의 입장에서 보는지에 따라 판단의 결과가 바뀔 것이다(사실 아줌마가 되고 난 후로는 자꾸 조강지처의 편이 된다. 그놈의 사랑이라는 게 다 지나고 나면 그게 그것인 걸......). 허나 두 사람이 만난 20년 동안 5,000통의 편지를 보내고 그것을 소중히 간직한 두 사람의 감성이 바로 시인의 그것일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무뎌지고, 그런 것이 없어도 사는 데 별 지장 없을 것 같은 아줌마로서는 참 신기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이 두 시인의 사랑을 통해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하나는 유치환의 그 유명한 시 <행복>이 바로 정운과의 사랑을 통해 나왔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청마가 한동안 편지에서 정운을 칭한 '정향(丁香)'이라는 단어가 프랑스 말로는 리라꽃, 영어로는 라일락, 순수 우리말로는 수수꽃다리라는 꽃을 부르는 말이라는 것이다.(난 다 다른 꽃인 줄 알고 있었다는 이 무식함.)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유치환, <행복>



헌데 왜 하필이면 기침과 가래인가? 무엇보다 기침과 가래는 머뭇거림이나 거침이 없다. 록 음악이 그러하며, 등산가의 한숨이 그러하며, 폭포가 또한 그러하다. 그것은 타협하지 않는 양심이며 내부 깊숙이 고인 시적 욕망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토해 내는, 아니 저절로 터져 나오는 시인의 살아 있는 목소리다. 생리적인고로 그것은 더욱 생명력에 가깝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생리적인 여러 현상들 가운데 굳이 기침과 가래가 선택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지금 나는 기침과 가래의 상징적 의미를 시, 노래, 음악 따위에서 찾고 있거니와,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관동별곡>을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면 "시션(詩仙)은 어데 가고 해타(咳唾)만 나맛나니"라는 구절을 기억하리라. 아울러 문자적 의미로는 기침과 침을, 관용적 의미로는 어른의 말씀을 뜻하는 이 해타가 바로 이태백의 '시'를 의미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리라.
                                               ------     깨끗한 기침, 순수한 가래, p298

     아이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시 중 하나인 김수영의 <눈>이라는 시를  저자는 이렇게 현대의 록 스피릿과 힙합 정신, 고전의 <관동별곡>까지 아우르며 설명을 해낸다. 그리고는 그 어느 편이든 문학에는 자명한 것이 없다는 확신을 가지라고, 상식이 뒤집히고 혼동이 되며, 그리하여 평면적으로 보였던 시가 3D 영화처럼 입체적으로 다가서야 한다고 말한다. 읽으면서 많이 감동받고 많이 창피했으며 많이 깨달음을 얻었던 책이다. 시집이 한동안 베스트셀러 순위를 장악하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가장 어려운 장르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사실 나 자신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껴야만 하는 시보다는 소설이나 기타 다른 장르를 집어 드는 것이 훨씬 편했으니까. 그래서 저자의 머리말이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다.


       허나 한 세월 살다 보면, 제법 잘 살아왔다고 여겼던 오만도, 남들처럼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는 겸손도 문득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마는 그런 날이 오게 마련입디다. 채울 틈조차 없이 살았던 내 삶의 헛헛한 빈틈들이 마냥 단단한 줄만 알았던 내 삶의 성벽들을 간단히 무너트리는 그런 날, 그때가 되면 누구나 허우룩하게 묻곤 합니다. 사는 게 뭐 이러냐고. 그래요,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어차피 잊히지가 않는 법, 잊은 줄 알았다가도 잊혔다 믿었다가도, 그렁그렁 고여 온 그리움들이 여민 가슴 틈새로 툭 터져 나오고, 그러면 그제야 비로소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여야 한다는 것을.      ------   저자의 머리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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