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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마루 Apr 27. 2016

북경 근교 첫 1박 2일 여행 -3

피서산장(避暑山莊)

   

   점심을 먹으며 한 숨 돌린 뒤 가장 기대하고 있던 피서산장(避暑山莊)으로 향했다. 우리에게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로 유명한 열하가 있는 곳. 온천이 많아 한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바로 열하(熱河)이다. 그러나 지금은 개명되어 청더(承德)라 불리고 있다. 피서산장은 궁전구, 산악구, 호수구, 초원구로 나뉜 네 지역이 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는 중국 영토 전체(중국 서쪽의 산간지대, 동북의 초원, 남부의 호수)를 의미한다고 한다. 서태후가 무리하게 증축을 해 왕조의 몰락을 앞당겼다는 불명예를 갖고 있는 이화원도 이 곳 피서산장 규모의 반 밖에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다.


    정문인 여정문에는 한자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만주어와 티베트어, 왼쪽에는 위구르어와 몽골어가 쓰여 있는 돌 편액이 붙어 있다. 이는 매년 이루어진 황제들의 행차가 북경의 더위를 피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 이유 외에 북방 이민족들을 막기 위한 위협이자 융화정책이었음을 보여준다. 연암도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특별 사행의 일원으로 중국 북경에 파견된다. 허나 황제는 피서산장에 머무르고 있었고, 한양에서 60여 일 넘게 걸어와 북경에 도착한 지 3일 후,  5일 내로 열하로 와 예식을 치르라는 황제의 명령에  열하로 가게 된다. 이 여정을 기록한 글이 바로 [열하일기熱河日記]인 것이다. 5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피서산장에 도착하기 위해 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고 고북구장성 또한 밤에 통과하는 강행군 속에서 [열하일기]의 가장 유명한 명문장인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야출고북구기 夜出古北口記 >가 나오게 된다.


    정문을 지나 외오문 다음에 나오는 내오문에는 강희제 친필로 쓰인 피서산장의 편액이 걸려 있다. 자세히 보면 '피(避)'자의 오른쪽 매울 '신(辛)'자의 가로획이 하나 더 그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피'자가 '피신하다, 숨다' 등의 패배적이고 부정적인 느낌의 단어였기에 강희제가 획을 하나 더 그음으로써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이 글자 본래의 뜻과 다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단다. 내오문 앞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지키고 있는데 발아래 공(?)을 가지고 놀고 있는 오른쪽에 위치한 사자가 수컷이고, 발아래 새끼를 가지고 노는(?) 사자(왼쪽에 위치)가 암컷이란다. 아무래도 암컷은 발아래 새끼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기보다는 사자만의 방식으로 새끼를 보살피는 것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 옛날 연암은 딱 여기까지만 들어올 수 있었단다. 지금은 전시장으로 사용되는 동쪽 조방(朝房, 조정의 신하들이 조회 시간을 기다리며 쉬던 방)에 들어가 황제의 아침 수라상에 오른 음식 몇 가지를 맛보고는 황제가 있는 쪽을 향해 삼배구고(三拜九叩)의 예를 행한 후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그 기나긴 여정을 견뎌 이곳까지 와서 황제의 얼굴도 못 보고 가야 했던 연암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 길을 지나면 황제가 있는 곳에 갈 수 있었을텐데... 연암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이 곳에서 가장 독특한 건물인 운산승지루(云山胜地楼)는 피서산장 내의 유일한 2층 건물이다. 그런데 건물 내의 어느 곳에도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없단다. 그럼 혹시라는 생각으로 건물 앞의 돌덩어리를 자세히 둘러봤더니 지금은 막혀있지만 그곳에 2층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숨겨져 있었다. 돌덩어리들을 옮겨와 계단을 만드는 이 놀라운 배포! 돌계단은 건물의 2층으로 바로 연결되어 있다. 1층에황제를 위한 연극을 공연하는 무대가 있고 돌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2층에는 황제와 황후가 복을 비는 불당이 있다고 한다.


    궁전구를 나오면 왼쪽으로 피서산장의 가장 넓은 구역을 차지하고 있다는 산악구가  나타난다. 워낙 넓어 셔틀버스를 타고 둘러봐야 한다는데 아쉽게도 우리가 갔을 때는 아직 운행을 하지 않는 시기였다. 산악구의 성벽에서는 아침에 보았던 수미복수지묘와 보타종승지묘를 바라볼 수 있단다. 안타깝지만 호수구를 지나서 평원구를 거쳐 나가기로 했다. 이렇게 넓고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평화로운 이곳이 옛날에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겠지? 황제가 아닌 이상, 황제의 명을 받들기 전에는 그 입구조차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으리라. 이런 걸 세상 좋아졌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기분에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아마 지금도 우리가 모르는 그 어떤 세계가 굳게 닫혀 있어 자기들만의 성을 유지하고 있을지도, 아니 아마 그러고 있을 것이 확실하기에......

   

    하루 동안 둘러본 청더 피서산장과 그 주위의 외팔묘의 서원 3곳 모두 중국의 옛 모습과 놀라운 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너무나 많이 걸어 다리는 물론 온몸이 쑤시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또한 연암 박지원을 생각할 수 있는 하루여서 국어교사로서 나름 뿌듯한 여행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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