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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마루 Jul 20. 2016

슬프고도 아름다운 하룻밤의 꿈.

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한겨레신문사

     어렸을 적 우리 집은 항상 10 식구가 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할아버지, 할머니에 결혼 안 한 삼촌들, 때로는 결혼한 삼촌과 작은 엄마와 사촌 동생들, 또는 외사촌들까지. 그래서 무엇이든 크고 양이 많았다. 음식이며, 보리차 끓이는 주전자며, 빨래 더미이며...... 그런 까닭에 나는 엄마 아빠와 단출하게 사는 다른 친구들이 부러웠다. 난 나중에 결혼하면 조그만 빨간색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숟가락 2개, 젓가락 2개, 컵 2개. 무엇이든 2개씩만 놓고 살 거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엄마와 아빠는 항상 바빴다. 아빠는 그 많은 식구들 입히고 먹일 돈을 버시느라, 엄마는 그 모든 뒤치다꺼리 다 하시면서 사업하시는 아빠까지 도우시느라. 지금 생각해보면 울 엄마가 늙어서 아프신 게 당연한 일인 것 같다. 그 많은 살림살이를 어찌 혼자 다 하시면서 버텨내셨을까? 난 어쩌다 애들 소풍 도시락 한 번 싸도 힘들고 귀찮던데 울 엄마는 매일 5~6개의 도시락을 싸셨으니..... 그래서일까? 젊었을 적 아빠, 엄마가 서로를 향해 따뜻하고 사랑 넘치는 눈빛이나 말을 주고받던 기억은 없다. 아빠는 전형적인 무뚝뚝한 남편이었고 엄마도 애교나 엄살이라고는 전혀 없는 아내였다.(그러고 보니 이 두 성격을 모두 고스란히 닮은 게 나로구나.) 그렇다고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그런 사이도 아니었다. TV 드라마에서 나오는 호호하하 웃음이 넘치는 화목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고성과 폭력이 오가는 그런 이상한 집도 아닌, 그냥 무덤덤한 가족이었던 것 같다. 아마 두 분 모두 그 시간을 살아내느라 다른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겠지. 하트가 뿅뿅뿅 날아다니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항상 엄마 아빠와 우리는 함께일 거라는 믿음은 의식할 필요도 없는 기본적인 것이었다. 


     왜 어린 시절 우리 집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가?  이 책을 읽으니 자꾸 '어린 시절의 우리 가족의 모습은 어떠했더라' 반추하게 되었다. 나와 비슷한 시기, 그 당시 어디에나 있음 직한, 사는 것에 그렇고 그렇게 닳아빠져 의도치 않게 서로에게 상처 주고 힘들어하는 가족의 모습을 그린 소설이기 때문이다. 맘에 들지 않는 며느리와 덜 떨어진 손자에게 마구잡이로 막말을 해대는 할머니, 할머니가 억지를 부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머니 편만 드는 고지식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인내하고 살아가는 어머니와 함께 사는 10살 한동구란 남자아이에게 영주라는 여동생이 생기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영주는 금방 한 가지 새로운 재주를 배워 나를 기쁘게 했다. 할머니나 엄마나 다른 어른들이 영주를 안아 줄 때 손바닥으로 등을 토닥여주는 것이 기분 좋았던지. 영주는 누군가가 자기를 안거나 업어주면 그 조그만 손으로 업어준 사람의 어깨나 팔을 토닥토닥 어루만졌다.   <중략>   나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먹통이고, 엄마나 아버지도 가끔 벽창호 같아  보일 만큼 고지식한 사람들이고, 할머니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도 너무 바쁜 사람이어서 영주가 존재하기 이전에 우리 식구들은 아무도 서로에게 애정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중략>   영주의 갑작스런 행동을 처음 접했을 때 우리 식구는 모두 몹시 당황했다. 그리고 곧 그 신기한 행동에 걷잡을 수 없이 매료되었다.   <중략>     내가 가방을 집어던지고 영주가 있는 방의 문을 확 열면 영주는 나를 보면서 꺄악 하는 소리를 지르고 두 팔을 쫙 벌렸다. 내가 덥석 안아 올리면 영주는 내 품에 고개를 파묻으며 손으로 내 팔과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나는 그 느낌 정말 좋아서 영주를 끊임없이 안아주고 업어주었다.     ---1977년 인왕산 허리 아래, p28

 

     할머니의 모진 말과 어머니의 고된 시집 살이, 그리고 아버지의 무관심과 손찌검 속에 눈치를 보며 살아가던 동구에게 여동생의 존재는 그야말로 한줄기 빛과 같았다.  더군다나 이제 태어난 지 몇 개월밖에 안 된 아가가 고사리 손으로, 그 집에선 경험한 적 없었던 애정 표현을 마구마구 해대니 그 얼마나 사랑스러울 것인가?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촌스러운 이름을 붙여주려는 어른들 앞에서 대성통곡을 함으로써  '영주'라는 예쁜 이름까지 얻게 해주었다.  


"봄맞이 새단장 바겐세일."
엄마나 아버지나 할머니나 모두 각자 할 말을 하느라 대화가 전혀 되지 않았다. 엄마는 얼마 전부터 저 아이가 혼자 뭐라고 중얼거려서 이상하게 생각했더니 그게 뭔가를 읽는 것이었던 모양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가수의 이름이나 노래 제목은 주워들은 풍월일 수 있지만 작사 작곡까지 읽는 건 틀림없이 얘가 벌써 읽을 수 있다는 증거라고 소리 질렀다. 할머니는 혼자 밥상을 보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나도 흥분되긴 마찬가지였다. 영주가 학교에 들어가서 그 총명함이 만방에 드러날 때 나의 자랑스러움이 클 것이라는 생각은 여러 번 했지만 영주가 그 몇 년을 더 기다릴 필요도 없이 기저귀를 벗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이토록 큰일을 해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 1978년 난독의 시대, p86

     그런데 영주는 한 살 조금 넘자마자 글을 읽는다. 초등학교 3학년인 동구가 난독증인 것 같다는 담임선생님의 말을 엄마에게 전한 날이었다.  아버지가 알게 되면 맞게 될 손찌검을 두려워하고 있던 때 영주가 버려진 신문에 있던 글을 읽은 것이다. 그때부터 온 집안의 관심은 영주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동구는 그러한 상황에 대해 조금의 원망이나 시기심,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 글도 못 읽는 자신 때문에 창피스러워하고 미안해하고 답답해하던 가족들에게  당당한 자랑거리가 된 영주가 마냥 예쁘고 고마울 뿐이다. 소설 속 동구는 아이 어른이다. 자신의 아픔이나 기분을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챙기는. 그러기에 멍청하기 그지없는 자기를 대신하여 가족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준 영주에게 일말의 질투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아빠가 미워."
갑자기 영주가 말했다. 나도 아버지가 미운 게 사실이지만, 영주가 그렇게 말하니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버지가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영주니까. 영주가 아버지를 미워한다면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를 미워한다거나 엄마가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과는 또 다른, 큰 충격을 받을 것이었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을 치워버리더라도 나는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영주가 어른들의 싸움 때문에 상처받고,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기를 바랐다. 누구에게나 웃으며 팔을 벌리고, 누구의 볼에나 쪽하고 뽀뽀를 해주는 내 도 천진한 어린 시절에 흠결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 1980년 황금빛 깃털의 새, p289


     그런 동구를 처음으로 알아 봐주고 이해해준 사람이 3학년 담임선생님인 박 선생님이다. 박 선생님은 글도 못 읽고 말도 어눌해 다른 사람들은 관심도 가지지 않던 동구의 감정을 이끌어낸다.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가족들의 감정이 아니라 동구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를 묻고 그 감정을 다독거린다. 어찌 보면 동구네 가족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 같다. 할머니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모진 말로 자신의 외로움을 표현한 것이었고, 어머니는 자신의 힘듦을 그냥 인내하는 것 밖에 몰랐고, 아버지는 힘들어하는 아내에게 고마움과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동구도 자신의 감정에 무딘 아이로 자란 것이다. 박 선생님 덕분에 동구는 조금씩 자신의 감정에 대해 알아가고 다른 가족들의 마음도 이해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나는 선생님의 자줏빛 원피스 자락에 고개 묻고 나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선생님 편임을 여러 번 다짐하며 왁왁 소리 내어 울었다. 박 선생님에게 건방지게 구는 이태혁도 나쁘고 그런 이태혁을 혼내지 않는 삼촌도 나쁘다. 선생님 편은 나 밖에 없다. <중략> 갑자기 선생님이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선생님이 감동하신 것일까? <중략> 어깨를 뒤흔들며 울고 있는 줄 알았던 박 선생님은 웃느라 숨을 쉬지 못해 허리를 뒤틀고 있었다. <중략> 나는 뭐가 뭔지 모르면서 삼촌에게 뒷덜미를 붙잡혀 선생님의 품 안에서 떨려 나왔다. 선생님은 손수건으로 계속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는데 아마 너무 웃다가 눈물을 흘리는 모양이었다.
"박 선생님은 참 좋겠어. 저렇게 사모하는 제자도 있고."     ---- 1980년 황금빛 깃털의 새, p250

     동구가 박 선생님에게 존경과 숭배가 담긴 사랑(?)을 고백한 그날 밤 박 선생님은 고향인 광주로 간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1980년 5월이었다. 10살 동구의 눈에 80년은 매일 놀러 가던 경복궁에 군인들이 돌아다니고 서울 시내에서 탱크를 실제로 볼 수 있던 신기한 시기였을 뿐이었는데. 그 시대는 동구의 가장 소중한 사람을 그렇게 빼앗아갔다.  그리고 할머니의 여행 문제 때문에 엄마, 아빠가 크게 싸우던 날, 그 싸움을 피해 영주를 데리고 감나무 아래로 간 동구는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영주를 잃는다.


아무리 연탄을 때도 집 안에 온기가 돌지를 않았다. 한겨울에도 세숫물을 데워 써본 적이 없던 할머니는 올해 겨울에 10년을 한꺼번에 늙는 듯했다. 할머니는 추위를 심하게 탔고, 자식 잡아먹은 재수 없는 년이 뻔뻔하게도 꼬리를 내두르며 집안에 버티고 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뼛골에 냉기가 스며든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모실 할머니가 수시로 내려와서 할머니의 손을 잡고 염불도 해주고 손목에 염주도 감아주었지만 할머니는 부처님에게서 얻는 힘을 모두 증오심으로 바꾸어 엄마에게 쏟아부었다.     --- 1981년 정원을 떠나며, p305    


     더 어긋나서 이제는 모르는 척 우길 수도 없는 가족들 사이에서 동구는 여전히 가족을 이해하고 봉합하기 위해 손을 내민다.  한 아이의 성장소설이라고 보기에는 주인공 동구가 너무나 불쌍했다. 가장 소중했던 사람들을 잃은 상처 입은 아이가 감정이 고장난 어른들을 끝까지 챙기는 게 아이의 성장이라면 그 성장이 행복한 것일 수 있을까? 그래서 난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힘든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동구가 꾼 아름답고도 슬픈 하루 밤의 꿈.


한 조각이라도 더 먹으려고 부산을 떠는 새들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나는 바랜 듯한 금빛 깃털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섰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놀란 새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날아올랐다. 하지만 나의 눈에 띄었던 금빛 가슴털의 새, 야윈 곤줄박이는 얼음 위에서 날아오르지 못학 깡총깡총 뛰어 연못을 벗어났다. 살아 있었구나. 나의 곤줄박이야. 그 어느 못된 손목이 던진 돌팔매에 맞아 날개를 다치고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이렇게 살아서 아름다운 나의 정원에 남아 있었구나.     ---- 1981년 정원을 떠나며, p305

     동구는 동네에 있는 3층 부잣집 정원을 좋아했다. 가끔 부잣집 대문이 열리면 꼭 들어가 구경하곤 했던 그 정원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금빛 가슴털을 가진 곤줄박이를 발견한다.  그 아름다운 정원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있는 그 곤줄박이가 바로 동구가 아닐까 싶다. 열심히 살아서 그처럼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가고 싶은 마음 착하고 배려심 깊은 아이 한동구 말이다. 

    

     당시에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가족의 이야기를 세밀한 관찰력과 따뜻한 묘사로 쉽게 이야기하듯 풀어내는 작가의 글이 편안하다. 개인의 이야기와 그 시대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연결시키는 것도 참 인상적이었다. 어려운 말이 없어서 아이들이 읽기에도 괜찮을 듯싶어 우리 큰 딸에게 추천해줬다. 근데 딸은 그다지 감동을 받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추억하는 나의 어린 시절과 딸이 추억할 어린 시절이 달라서일까? 

     하지만 나는 이 책이 참 좋다. 문학적으로 정말 훌륭하고 잘 쓰인 글은 아닐지 몰라도 따뜻한 진심이 드러나는 글이라서 정말 좋다. 한국서 신랑이 내게 이 책을 추천했을 땐 표지가 끌리지 않아 제쳐두었었는데, 지금은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영주는 우리 식구들 중에 유일하게 애정 표현이 자유롭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 아이가 벌리는 팔과 그 아이가 내미는 입술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 아이를 통하지 않고는 웃지도, 이야기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게 길들여져 있었다. 우리 가족들은 마치 신호등이 고장난 네 갈래 길에 각각 서 있는 당황한 사람들처럼, 서로 말을 걸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바라만 보게 되었다. 우리의 소통이 엉키지 않도록 요술 같은 방법으로 누군가는 기다리게 하고, 누군가는 직진하게 하고, 누군가는 좌회전하도록 지도하던 우리의 푸른 신호등은 영원히 잠들어버렸다. 우리는 신호등 없이는 교차로를 지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 1981년 정원을 떠나며,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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