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하게 내 머릿속을 바탕으로 한,
나는 원래 지도를 잘 보지 못한다. 그리고 방향치이다. 수없이 많이 갔던 마트도 다른 출구로 나오면 어김없이 방향을 잃고 헤매고 만다. 분명히 지난번 확인했던 지도의 목적지도 다른 위치에서 보면 못 찾는다. 그러니 눈이 있어도 글을 읽을 수 없고,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는 이 곳에서 나는 아무 곳도 갈 수 없는 신세다.
그래서 제일 시급한 게 이 곳 왕징의 지리를 익히는 것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동네의 지리를 익히는 방법은 단 하나 몸으로 체감하는 것이다. 마트 가는 길만 익히다 중국어 학원을 다니기로 마음먹은 날, 왕징 시내에 있는 중국어 학원까지 온 식구 모두 함께 걸어가 봤다. 가는 길에 은행도 들르고, 시은이가 한국 친구들에게 엽서를 보낸다고 해서 우체국에도 들르고, 또 필요한 문구를 사기 위해 문구 나라에도 들르는 바람에 왕징을 크게 한 바퀴 돌아 목적지인 학원에 도착했다. 그러자 방향치인 나에게는 너무나 많은 양의 지리 정보가 쓰나미처럼 밀려온 까닭에 자기들끼리 뒤죽박죽 되어버리고 말았다. 최대한 단거리 코스로 돌아온다고 돌아왔으나 여전히 오리무중. 어쩔 수 없이 다음 날부터 혼자 지도 들고 휴대폰 들고 중간중간 가슴 철렁하며 조금씩 만들어 간 것이 내 머릿속 왕징 지도이다.
이렇게 보면 그냥 큰길을 따라 죽 갔다가 한 번 좌회전하면 그만인 아주 간단한 길이건만 실제 길로 나서면 아파트들이 다 그 게 그거 같고 이 길이 아까 그 길 같고 여기가 꼬부라진 길 같고... 아주 야단이 아니다.(그러니 내가 길치겠지만......) 부르는 명칭이 행정구역명인 곳도 있고 아파트명인 곳도 있고 솔직히 뭐가 뭔지 구분이 잘 가지 않지만 지금의 나는 이렇게 구분하고 다니고 있다. 맨날 걸어만 다니다 이제는 버스 타는 곳도 알게 돼서 학원 갈 때는 리저씨위엔으로 걸어나가서 버스를 타고 학원 앞에서 하차하는 잔머리도 굴린다. 돌아오는 길은 어느 마트에 가서 장을 보느냐에 따라서 약간씩 달라지는데 조금씩이라도 다른 길로 가보려고 노력 중이다.
길을 다니며 글을 못 읽는 우리네 할머니들의 심정이 이랬을까 하는 마음으로 상점의 간판들을 보며 '이 곳은 뭐하는 곳일까?' 혼자 마구 답답해한다. 그래도 할머니들은 말이라도 통했으니 나보다 덜 답답했겠지. 오늘은 버스에서 내리려고 서 있는데 정류장서 버스가 뒷문을 안 여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버스를 탈 때마다 '운전기사가 문을 안 열어주면 어떡하지' 속으로 걱정하곤 했는데 그 일이 실제로 이렇게 빨리 벌어질 줄이야. 급한 나머지 문을 두드리며 "문 열어주세요!"하고 소리치자 운전기사와 버스 차장 둘 다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문을 열어 줬다. 난 뒤도 안 보고 뛰어내렸다. 그런데 참 기막힌 타이밍, 오늘 학원에서 배웠다. "카이 이씨아"-> 문 열어주세요. 하루만 일찍 배웠으면 난 그 상황에서 "카이 이씨아"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아마 똑같이 "문 열어주세요!"하고 내뺐을 거다.^^
그래도 이제 한 군데씩 아는 곳이 생겨난다. 자주 가는 마트 위층에 있는 소수민족이 하는 듯한 식당은 우리가 외국인인 걸 알고는 아주 친절하게 대해준다. 주인아저씨는 계란도 서비스로 주시고 종업원들은 눈빛으로 이 것이 네가 시킨 것이라고 얼른 가져가라고 알려준다.(셀프서비스다) 왕신화원 지하에 있는 해산물 시장에는 조선족이 하는 횟집이 있어서 중국어를 안 하고도 회를 떠서 먹거나 집으로 배달시켜 먹을 수 있다. 그래서 가은이는 해삼을 매일 먹고 싶단다. 맥도널드에 가서 세트메뉴를 시키고 싶을 때는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지 말고 그냥 사진을 찍어 보여주면 된다. 그럼 뭐라 뭐라 설명한다. 그럼 그냥 내가 먹고 싶은 것만 가리키면 된다. 그럼 그냥 계산하고 싸준다. 그렇게 싸 와서 먹었더니 정말 맛있더라.^^ 비싼 마트(이름을 까먹었다)서 산 닭고기는 가격은 저렴했지만 정말 맛있었다. 물론 나의 요리 솜씨 탓이 컸겠지만 비싼 마트, 닭고기만 사러 가끔 출동하시겠다. 이렇게 나는 오늘도 왕징을, 새로운 우리 동네를 몸소 부딪쳐가며 익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