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것’을 그리는 시간이 있었나 보다. 아이가 그렸다고 가져온 그림에는 커다란 소파와 커피, 그리고 맥주가 나와 함께 그려져 있었다. 처음엔 조금, 아주 쪼금 흔히 생각하는 엄마의 모습과는 다른 내 모습이 부끄럽긴 했지만,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 이게 내 모습인걸.” 그때부터 아이들을 세뇌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수백만 원짜리 가방에 목매는 것도 아니고, 비싼 브랜드 화장품만 얼굴에 바르는 것도 아니잖아. 옷이나 가방도 유명 브랜드 옷을 고집하는 거 봤어? 엄마는 그저 커피와 맥주를 조금 좋아하는 것뿐, 얼마나 알뜰하고 소박한 취향이야!” 다행히 착한 아이들은 이해했던 건지, 아니면 이해하는 척했던 건지, 나중에는 우리 가족은 나중에 가족 모임을 하면 음식값보다 술값이 더 많이 나올 것이라 걱정까지 했었다. 그 걱정대로 요즘 우리 가족은 외식 때마다 서로 먼저 술을 마셔버리기 위한 눈치 싸움을 한다. 술을 마셔야 운전을 못 하고, 운전을 못 해야 술을 많이 마실 수 있으니까.
사서 마시는 맥주에 만족하지 못해 집에서 직접 빚어 마시기까지 하던 차에 중국행이 결정되었다. 중국(정확히 말하면 내가 살았던 베이징)에는 참 다양한 맥주가 있었고 가격이 매우 쌌다. (맥주 한 캔의 가격이 2~3위안, 당시 환율 180원으로 계산하면 한화 400~500원 정도) 물보다 싼 가격에 마트의 맥주 매대에서 난 매번 헤벌쭉 웃고 있었다. 그러나 초보 거주자는 가끔 실수를 한다. 처음 혼자 장을 보던 날, 필요한 반찬거리를 사고 또 맥주 매대를 구경하다 보니 처음 보는 맥주가 휘황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거다. 새로운 맥주에 마음이 설레어 가격 확인도 없이 카트에 얼른 담았다. 비싸 봐야 맥주지 싶었다. 룰루랄라 즐거워하며 계산대에서 계산하는데, 예상보다 3배나 높게 찍힌 금액. 도대체 뭐지 싶었다. 그러나 중국말을 못 하니 이유를 물어볼 수도 없고. 계산 끝내고 한쪽 구석에 서서 조용히 영수증을 살폈다. 내가 산 6캔 묶음 맥주가 89위안(약 16,000원), 3일 치 장 본 금액이 45위안(약 8,000원)이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다. 중국살이 초기라 여기저기 들어가는 돈이 많아 생수도 손을 덜덜 떨며 시킬 정도로 긴축 재정 중이었다. 왜 가격 확인을 안 했을까? 계속 자책하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온 아이들에게 우울해하며 이야기했다. 딸들은 한국 돈으로 치면 한 캔에 2,700원 정도인데 비싼 것도 아니라며 위로를 건넸다. 이 우울함은 며칠 뒤 '솔라나'라는 세련된 맛집 거리 음식점에서 38위안짜리 칭다오 맥주를 마시곤 씻은 듯이 사라졌다. 마트 가격의 10배가 넘는 맥주 가격 지출. 더 큰 아픔으로 이전의 아픔을 지워버리는 충격 요법이었다.
1. 옌징 피지우(연경 맥주,燕京啤酒)
베이징의 옛 이름 ‘연경’을 딴, 가장 흔하고 친숙한 맥주다. 특별한 풍미보다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시원하게 마시는 음료수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맥주든 음료수든 차가운 것을 기피한다. 그래서 식당에 사면 늘 '삥더!(빙더, 氷的!)'를 전투적으로 강하게 외쳐야 겨우 미지근함이 가신 맥주를 만날 수 있다. 연경 맥주도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그 중 위엔지안바이피(원장백비原漿白啤, 화이트 맥주) 맥주가 수제 맥주 맛에 가장 가깝다. 밀맥주의 효모 향이 살아 있어 한국서 자주 갔던 상수동 수제 맥줏집이 몹시도 그리워지는 맛이었다.
2. 칭다오 맥주(청도 맥주, 靑島啤酒)
양꼬치 앤 칭다오! 우~쥬 맥주? 중국 하면 떠올려지는 맥주. (몇 년 전 오줌 사건 때문에 주춤하긴 했지만) 한국서 양꼬치와 함께 먹을 땐 그래 ‘이게 칭다오 맛이지’하며 먹었었는데 중국에서는 그냥 중국 맥주 같았다.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지? 중국 맥주 맛이 다 칭다오 같아서 그런가 보다. 칭다오 맥주도 그 종류가 매우 많다. 하지만 나의 최애는 칭다오 츈성(순생, 純生)이라 부르는 생맥주 라인이었다. 생존 중국어 학원 선생님이 마트 실습(수강생들이 아줌마들이라 동네 마트며 음식점으로 장보기, 음식 주문 등을 배우기 위한 실습을 하러 가곤 했었다.) 때 강력히 추천해 주신 맥주도 있었는데 내 입에는 그렇게 맛있게 느껴지지 않아서 계속 칭다오 츈성만 부르짖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칭다오 맥주의 참맛은 ‘칭다오 맥주 박물관’에 있다. 박물관 관람을 하면 중간에 원장 맥주 한 잔, 마지막에 생맥주 한 잔을 시음할 수 있다. 칭다오 맥주의 역사와 제작 과정은 중요치 않다. (그것이 궁금해 관람료를 낸 게 아니란 말이다) 무엇보다 첫 번째 시음하는 원장 맥주라는 것이 비열처리, 비여과 생맥주로 칭다오에서만 구할 수 있는 맥주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중국서 먹어 본 맥주 중 최고였다. 얼마 전 큰딸도 엄마가 박물관에서 맛보라고 준 칭다오 맥주가 가장 맛있었다고 회상하기에 같이 손을 잡고 좋아라 했었다. 그때 딸은 고딩이었는데... 역시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 맛이다.
3. 하얼빈 맥주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유명한 얼음의 도시 하얼빈, 그곳의 맥주가 하얼빈 맥주다. 가장 큰 매력은 압도적인 가성비였다. 동네 마트서 배달을 시켜도 작은 캔 24개 한 박스에 65위안(약 12,000원)이면 됐다. ‘솔라나’ 맛집의 맥주 2병이면 한 박스 사고도 돈이 남는다. 어쨌든 한국 돈 12,000원도 안 되는 돈을 가지고 맥주 한 박스를 시켜서 먹으면 그때만은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4. 그 외
태산 맥주(泰山啤酒)는 유효기간이 단 7일뿐인 수제 맥주 급 기성 맥주다. 술을 좋아하던 한 지인도 처음 중국에 와서 이 맥주의 맛에 반해 인터넷으로 바로 주문했단다.(이 얘기를 듣고 나는 술도 인터넷 배달이 된다는 것을 알고 쾌재를 불렀었다. 앗싸!) 문제는 한 박스를 주문한 거다. (이 맥주는 750ml 병에 담겨 있다.) 배달 온 후에야 7일이라는 유효기간을 확인했고 며칠 뒤 한국으로 들어갈 일정이 있었던 그는 눈물을 머금고 주위 사람들에게 맥주를 선물할 수밖에 없었다는 슬픈 이야기.
또 하나, 행복의 이유는 아사히 생맥주였다.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의 아사히 생맥주가 어느 술집에나 있었다는 것. 아사히 생맥주 3000cc 맥주 타워의 영롱한 자태에 취하던 기분을 잊을 수 없다.
지금 나는 중국에서의 시간을 내 인생의 화양연화라 부른다. 그때까지 나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취업, 6개월의 육아 휴직을 제외하고는 출근을 안 한 적이 없었다. 육아 휴직 6개월은 출퇴근이 없는 일터였다. 처음으로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안 해도 됐다. 월요일이 기다려지기는 태어나 처음이었다. 월요일이 주말의 복작복작함에서 벗어나 고요함을 누릴 수 있는 날일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간식을 준비해 놓고 아이들의 하교를 기다려보기도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내가 제일 많이 사랑하는 맥주를 마음껏 신나게 마실 수 있었던, 맥주 거품처럼 빛나고 풍성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