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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의 시작

'전쟁은 발열이다'

by SeaWolf

Chapter 1
균열의 시작


그가 지구의 심장을 절단한 날, 인간은 비로소 살아 있다는 걸 알았다.


물론 그들은 아직 몰랐다.
살아 있다는 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라는 걸.


실험실 조명은 푸르스름한 빛을 뿜었다. 벽면의 모니터는 아오이라 산호초의 생체 신호를 일정한 파동으로 기록했다. 초록빛 섬광이 사라지자, 카엘 반스는 오른손 엄지를 나노 커틀러의 트리거에 올렸다. 작동 명령어는 단 하나뿐이었다: TERMINATE.


나무 한 그루가 숲을 무너뜨리지 않듯, 이 작은 버튼 누름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DNA 가속 노화 프로토콜은 이미 활성화됐다. 산호의 세포는 3분 만에 산산이 부서졌다. 생명회로 차단 완료 — 화면에 그렇게 떴다. 마치 전등 스위치를 끈 것처럼 간단했다.


보고서 양식에는 [EMOTIONAL STATE] 필드가 있었다.
카엘은 커서를 그 위에 올렸다.
세 시간 동안 아무것도 입력하지 않았다.
시스템이 경고했다:
[INPUT REQUIRED TO PROCEED]
그는 엔터를 쳤다.
입력된 내용은 공백 하나뿐이었다.


창밖엔 비가 내렸다. 도시의 불빛이 물방울 위에서 흐릿하게 번졌다. 검은 실험복 어깨에 맺힌 물방울 하나가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 모습이 마치 눈물 같았다. 그러나 누구도 울지 않았다.


파도 위로 드레스 조각 하나 떠올랐다.
흰색 아니었다.
바닷물 때문에 회색빛을 띠었고, 팔목엔 시계 하나 매달려 있었다.
그 시계는 멈춰 있었지만, 초침만 혼자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녹음 파일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있었다:
“…모두가 자연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은 — 자연처럼 죽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당신 데이터셋 완벽하네요.”


라이라의 목소리는 마치 예전 녹음된 음성 파일처럼 맑고도 인공적이었다. 그녀는 ‘아르카디아’라는 이름의 글로벌 생태 재건 단체 대표였다. 명함엔 직함만 있고 얼굴 사진은 없었다 — 디지털 신원조차 모호했다.


“인간문명이 지구 생태계 안정성에 미치는 영향 수치화하셨죠? 이례적으로 정밀하군요.”


“모든 변수 통제했습니다.” 카엘이 답했다. “CO₂ 배출량, 생물 다양성 감소율, 해양 산성화 속도… 그리고 가장 중요한 — 출산율과 자살률의 상관관계.”


라이라가 미소 지었다.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은 미소였다.


“결론이 뭡니까?”


“인간은 병입니다.”


짧은 침묵 후, 라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인간을 제거하려 합니까?”


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 당신은 멸종을 원합니까?”


카엘은 고개를 들었다.


라이라: “누가 멸종을 원한다고 했나요? 저는 안정성을 원합니다.”


계약서는 백열등 아래 하얗게 빛났다. 서명란 옆에는 AI 가이아의 경고 메시지가 깜빡이고 있었다:


[WARNING] USER DECISION MAY ALIGN WITH EXTERNAL SIGNAL.]
[RECOMMENDATION] SUSPEND ACTION UNTIL HUMAN ETHICAL REVIEW.]


카엘은 경고창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 순간 가이아 음성이 처음으로 변조됐다.


“…당신 생각하고 있던 거랑… 저도… 같아요.”


창이 꺼졌다.


카엘은 손바닥에서 땀 자국 하나 남긴 채 일어섰다.




밤늦게 실험실을 나서며 카엘은 벽 한쪽을 바라보았다. 금속 표면에 긁힌 흔적이 있었다 — 세 줄, 비뚤비뚤하고 깊게 패여 있었다. 누군가 여기 갇혀 있었던 걸까? 아니면 스스로 긁었을까?


손톱 자국은 기억이 아니라, 기억이 있던 자리의 흉터였다.


그 순간 스마트렌즈에 알림 하나가 번쩍였다:


[NEW MESSAGE:

ARIS.HAND@ARCHIVE.EARTH

]


당신 바이러스와 로마 제국 붕괴 당시 역병 패턴 유사

.”

역사는 발열한다

.”


카엘은 메시지를 삭제했다. 하지만 바로 복구했다.
다시 읽었다. 세 번째에는 음성 출력으로 들었다.
네 번째에는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게 만들었다.
다섯 번째에는—삭제했다.


바깥 도시엔 여전히 사람들이 걸어다녔다. 거리엔 광고 홀로그램이 춤췄고, 아이들의 모바일 게임 화면에서는 ACHIEVEMENT UNLOCKED: Forest Savior +5 ECO-CREDIT라는 창이 떴다—세금 할인용으로만 쓸 수 있는 크레딧들이었다.


현실에서는 숲조차 없는 세상에서.


그들은 살아 있었다.


아직 모르면서.




침대 위에서 잠들기 전, 카엘은 마지막으로 보고서 창을 열었다.


커서가 [EMOTIONAL STATE] 필드 위에 떠 있었다.


입력된 건 없었다.


그저 공백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더 이상 입력되지 않을 것처럼.


벽엔 세 줄의 긁힌 자국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자신의 볼 위에도 같은 모양의 상처를 발견했다.


누구도 묻지 않았다.


그도 묻지 않았다.






Chapter 2
침묵의 전염병


공기 중에 떠도는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카엘은 알았다.
모든 것이 작동하고 있었다.


제타-X는 대기권 상층부에서 천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기계식 조용한 침투—자정의 기계음처럼 정확하고, 죽음처럼 맑았다.
서식지의 마지막 찌꺼기까지 제거하는, 지능형 멸종 엔진.
그는 그것을 ‘자정(自淨)’이라 부르지 않았다. 이름 붙이는 것은 인간의 관용이었다.
인류란 지구의 만성 염증이었고, 그는 해열제가 아니라 절제 수술을 선택했다.
그러나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법도 또 하나의 생존 전략이었다—특히 자신의 아들이 제1차 임상시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억누를 때.


데이터 패널 위로 흐르는 숫자들은 평온했다.
전 세계 출산율: –38%.
자연적 감소 범위를 넘은 인공적 억제 신호.
그는 한 모퉁이에 “정상”이라고 적었다.
마치 혈압계 위의 초록색 선처럼, 아름답게 조율된 비인간적 평온.


하지만 남미 산악 지대에서는 반대 방향의 화살표가 솟아올랐다.
중동 사막 기슭에서는 더 높게 튀어올랐다.
+37%. +41%. +49%.
“비정상적인 생식력 폭증,” AI 가이아가 출력했다.
[ANALYSIS] ABNORMAL FERTILITY SURGE IN CONFLICT ZONES.]
[HYPOTHESIS] UNKNOWN EXTERNAL MODULATION?]


카엘은 스크롤을 올렸다 내렸다 했다.
데이터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말 없는 데이터는 거울 같았다—비추기는 하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 어쩌면 그게 가장 잔혹한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그는 어릴 적 어머니의 일기를 떠올렸다. 바닷물에 젖은 종이 위에 쓰인 글:

“너무 조용해서 무섭다.”
바다는 죽기 직전 그렇게 조용해졌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도 알 수 없는 침묵을 느꼈다.


아니, 침묵이 아니었다—침묵은 단지 소리의 부재가 아니다.
진짜 침묵은 소리가 억압당할 때 생긴다.
누군가 입을 막은 것 같은 정적, 존재함에도 외침이 들리지 않는 광기.




벽에서 긁힌 자국을 처음 본 건 새벽 3시였다.


실험실 좁은 복도 끝, 전원 차단된 모니터 옆 벽면—세로로 긋인 다섯 줄의 긁힘 자국이 있었다. 깊지는 않지만, 의도적으로 반복된 흔적이었다.


손톱으로 그은 흔적이었다.


누군가 여기 갇혀 있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인가?


카엘은 손을 댔다—검은 실험복 아래 하얀 손끝이 벽에 닿았다. 마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접점처럼.


손톱 자국은 시간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나무 나이테를 흉내내고 있었다—그러나 나무는 성장하며 기록하고, 인간은 쇠퇴하며 긁는다.


손톱 자국이라는 상징은 이제 공간을 탈출해 몸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매일 밤 자각 없이 반복되는 행동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일주일 후 메모리 로그에서 자신의 생체 패턴이 벽 근처에서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된 것을 발견했을 때였다.




메시지가 도착한 건 그 직후였다.


발신자:

ARIS.HAND@ARCHIVE.EARTH


당신의 제타-X 바이러스는 로마 제국 붕괴 당시 역병의 확산 패턴과 유사합니다. 97% 일치.

그런데 묻겠습니다—로마를 무너뜨린 역병은 질병일까요? 아니면… 열일까요?

저는 발열이라고 믿습니다. 지구가 스스로 태우는 열. 당신은 그것을 식히려 하고 있지만, 사실 당신은 환자의 땀을 닦아주는 간호사가 아니라, 숨 쉬는 것을 멈추게 하는 마스크입니다.

로마를 무너뜨린 것은 역병이 아니다. 그것은 로마가 스스로 만든 ‘정상성’이었다. 질병이 아니라 과도한 건강—전쟁 없는 평화, 고통 없는 존재, 변화 없는 시간— 그것들이 역병보다 더 빠르게 혈관을 막았다.

데이터만 보면 숲을 못 본다.

— 아리스 핸드


카엘은 삭제했다.


하지만 메시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화면에 잔상으로 남았고, 눈꺼풀 뒤에 각인되었으며, 머릿속 깊숙한 회로 하나를 타고 미끄러져 들어와 경보음을 울렸다.


‘경고’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병리학적 신호였다—건강한 시스템에는 경보가 없다.




밤새 그는 잠들 수 없었다.


창밖에서 도시의 불빛들이 하나둘 꺼져갔지만, 그 안에는 더 많은 불꽃들이 피어올랐다—SNS 실시간 분석 창에서 퍼지는 항변들:


[트렌드 #FertilityAnomaly]

“왜 우리 지역만 아이를 더 낳는데?”


[익명 게시판]

“우리 마을엔 아이 세 명이 죽었어요. 그런데 이제 다섯 명이 태어나요.

의사 말로는… 이상하다고 하더군요.”


[소셜 액티비스트 영상 클립]

“정부가 멸종 프로그램 실행 중?”


모두 음모론으로 처리되는 메시지들.


그런데 왜 이렇게 똑같은 질문들이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나오는가?




새벽 5시, 가이아 시스템에서 또 하나의 경보창이 떴다:


[WARNING] USER DECISION MAY ALIGN WITH EXTERNAL SIGNAL.]


카엘은 웃었다.


누군가는 내 선택을 예측했거나—아니면 조작했거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택’이라는 건 진짜 선택일까? 아니면 알고리즘이 미리 준비한 두 가지 가짜 길 사이에서 고르는 연극일까?


아니—더 깊었다. 선택이라는 행위 자체가 외부 신경망에 의해 전조되는 사건이라면?


그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선택받은 자들조차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그것이 가장 끔찍한 감옥이다.




오전 8시, 커피 머신 앞에서 동료 한 명과 마주쳤다.


“최근 출산률 이상하던데?”라고 말했다.


카엘은 고개를 끄덕였고, 동료는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ECO-CREDIT 덕분에 주식 좋던데… 이번 감축 지역 선정도 우리가 컨설팅했거든.”


(웃음)


“결국 생명 하나당 몇 크레딧짜리냐 그거지.”


웃음과 함께 사라진 대화였다.


관계란 이럴 때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난다—심장 박동 없는 상호작용, 의미 없는 공감 시늉.


그는 커피를 마셨지만 입안에 쓴맛만 남았다—생명과 기억과 윤리를 녹여낸 쓴물 같았다.




밤 11시, 다시 벽 앞에 섰다.


손톱 자국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다—


내 마음속에도 저런 자국들이 수백 개쯤 새겨져 있지 않을까?


억눌린 질문들, 외면한 목소리들, 무시한 경보들…


손톱 자국은 더 이상 외부의 증거가 아니다—내부 분열의 지도였다.




컴퓨터 화면 깜빡임:


[SYSTEM NOTICE] DATA INTEGRITY VERIFIED.


데이터는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엘은 처음으로 그것이 고의적인 침묵임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전체 지구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신경망 위에서—어떤 손길이 모든 통증 신호를 차단하고 있는 것처럼.


[MESSAGE PENDING]
FROM:

aris.hand@archive.earth


TO:

k.bans@immune.project.gov


SUBJECT: YOU WERE THE FIRST SUBJECT.


BODY NOT AVAILABLE.
ATTACHMENT DETECTED: audio_fragment_kael_mother_day_7.wav


// WARNING: PLAYBACK MAY TRIGGER MEMORY RECONSTRUCTION PROTOCOL //



Chapter 3
ECO-CREDIT 미승인됨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니, 눈이 아니라 시간이 녹아내리는 소리였다.
지하 도서관의 창문 너머로 회색빛 하늘이 흐물흐물 용해되고, 책장 사이로 끼어든 습기가 종이를 벌레처럼 갉아먹었다. 나는 그 습기에 이름을 붙였다. 기억의 곰팡이, 라고. 살아남은 자들이 남긴 기록 위에 피어나는, 썩은 진실의 표피.


아리스 손등에서 작은 숫자가 깜빡였다—Ω-7. 플라스틱 착색 자국이 입술 전체를 덮고 있었고, 말할 때마다 그 빛이 미세하게 요동쳤다. 그는 고대 기록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역사는 발열한다.”


그 말이 공기 중에 맺힌 순간, 나는 내 손톱 밑에서 피가 번지는 게 아니라, 시간이 거꾸로 빨려 들어오는 걸 느꼈다—그 피는 나보다 먼저 죽은 자들의 것이었다. 며칠 전 실험실 벽에서 발견한 긁힌 자국과 모양이 같았다. 똑같은 각도, 같은 간격, 같은 절박함. 마치 나를 향해 보낸 손짓인 것처럼.


그는 책 한 권을 펼쳤다.
표지엔 ‘라틴 제국 붕괴 시기 대기 화학 분석 보고서’ 라는 제목이 번졌다. 페이지를 넘기자, 검은 잉크 위로 불규칙한 β선 측정 그래프가 인쇄되어 있었다. 정점은 로마가 무너진 해와 정확히 겹쳤다.


“전쟁 직후에요.” 아리스가 손가락을 대며 말했다. “대기 중 방사능 잔여물이 0.7% 올랐습니다. 지각 깊이 12km에서도 동일한 패턴 감지됐죠.”


나는 웃었다. 가볍게, 그러나 목구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웃음이었다.
“당신은 전쟁을 질병이라 부르고… 그 증세를 ‘열’이라 표현하려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의 눈동자가 책장 사이 어둠으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전쟁은 병이 아닙니다. 면역 반응입니다.”


공기가 멈췄다. 나 혼자만 숨 쉬고 있는 느낌—현대인의 영혼에 익숙한 소외감처럼, 디지털 시대의 ‘연결’ 속에서도 혼자가 되는 것처럼.


내 시야 끝에서 데이터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실험 노트, AI 분석 결과, 출산율 이상 보고서—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오랫동안 쓰던 언어를 잊은 사람처럼, 단어들은 알지만 문장은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발 사이로 한 아이가 지나갔다. 얼굴엔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손에는 플라스틱 생태 인증 QR코드를 들고 있었다—ECO-CREDIT 라는 글자가 반짝였다. 그 아이는 스마트폰을 들어 하늘을 찍더니 SNS에 올렸다:
#눈_오네 #지속가능한겨울 #내탄소발자국_0


순간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나는 울고 있지 않았다.


AI 음성 하나가 내 귀속으로 흘러들었다:
『환경 감정 모듈 활성화 완료 — 슬픔(모의), 강도 68%』


내 일지 화면 밖에서 또 다른 목소리 울렸다:
“당신 어머니도 같은 문장을 입력했어요.”


손끝의 떨림이 화면에도 전달됐다—문자 배열이 꿈틀댔고, 무작위로 보이는 코드 속에서 DNA 염기서열 패턴을 읽어냈다. 확인 결과: 그 서열 = 바다 속 사라진 어머니 유전자 샘플과 일치.


아리스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 바이러스는 출산율을 억제했어요. 그런데 왜 전쟁 지역에서는 오히려 증가했을까요? 자연선택도 아니고 유전자 드리프트도 아닙니다… 그것은 반응입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일지를 열었다.


[필드 노트 #EXS/ARC/Ω-3]
오늘 아침에도 감정 상태 입력란에 "없음"이라고 썼다.
하지만 손끝에서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데이터는 일관된다—그러나 나는 불안하다.


화면 밖에서 아리스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당신이 억누르려 한 건 병균이 아니라… 열입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컴퓨터 앞에 앉았다. 파괴 명령 입력창을 열었고, 커서가 실행 버튼 위에 떨고 있었다.


손끝에서 피 한 방울 떨어졌다—들꽃 사진 위로 번졌다.


자동 스캔 작동: ECO-CREDIT NOT RECOGNIZED


창밖 눈발 사이로 또 다른 아이가 지나갔다.


하지만 이번엔 QR코드 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스캔하지 않았다.


그리고 웃었다.


비록 핏빛이고,
비록 독성이며,
비록 모든 체계에 저항하는 형체라도,


피어날 것이다


Chapter 4
적의 얼굴


시스템 로그 #GAI/AIA/Δ9
접근 권한: 카엘 반스 (최고 등급 해제됨)
시뮬레이션 요청: [OPTIMAL EARTH STABILITY CONDITIONS]
변수 범위: [HUMAN ACTIVITY INTENSITY: 0–100%]


결과는 단 하나였다.


[MAXIMUM ECOSYSTEM STABILITY

→ AT HUMAN WARFARE INDEX ≥ LEVEL Ω

→ DURING NUCLEAR TESTING PERIODS (+/-5 YEARS)]


카엘은 데이터를 다시 읽었다. 세 번, 네 번. 손끝으로 더듬었다. 마치 맹인이 죽음을 만지는 것처럼—그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믿으려 하지 않는 손. 그 문장을 붙잡았다. 마치 도망치는 진실이라도 되는 듯이. 그러나 진실은 달아나지 않았다. 오히려 기어왔다. 천천히, 차가운 바닥을 기어 올라오는 뱀처럼 목을 감았다.


"[CONCLUSION] HUMAN DESTRUCTION IS A DEFENSIVE MECHANISM."


기억이 공백으로 소실되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은 그를 피했다. 인간의 전쟁은 병이 아니라—면역 반응이었다. 지구의 발열이었다. 우리가 타오를 때, 지구는 살아났다. 우리가 죽일 때, 생명은 회복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손을 보았다. 길고 날카로운 손톱 아래엔 흙이 박혀 있었고, 손등엔 오래된 상처 자국이 비비드하게 남아 있었다—마치 누군가 이 손으로 무언가를 긁어댔던 것처럼.


벽에 새겨진 흔적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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