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구! 당장 나와!”
영화 <인비저블맨>의 세실리아는 숨통을 조여오며 서서히 다가오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절규한다.
투명인간은 인간 역사의 오래된 판타지이다. 플라톤의 <공화국>에는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마법 반지가 등장해 이를 착용한 이가 온갖 악행을 저지르도록 도와줬고,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는 악마가 자신과 박사를 투명하게 만들기도 했다. 허버트 조지 웰스의 <투명인간>에서는 최초로 마법이 아닌 과학 기술로 보이지 않는 존재를 만들어 내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투명 망토를 든 해리 포터는 또 얼마나 귀엽던지!
내가 투명인간이 된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법한 상상이다. 어린 시절에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실컷 아이스크림을 퍼먹고 싶었고, 청소년기에는 좋아하는 연예인을 몰래 따라다니길 원했고, 사회 초년생 때는 텅 빈 지갑을 바라보며 은행을 터는 상상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왕따의 일종인 ‘은따’는 주위 사람들이 아예 상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다. 주로 자존감이 낮고 자기방어 능력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타겟이 된다는데,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더 억울한 일이다. 자존감 없는 것도 서러운데 누군가의 은밀한 공격까지 감내해야 하다니... 어느 정신과 의사는 은따가 한국 사회의 문제점 때문에 일어난다고 분석했다. ‘정상’이라고 간주되는 범위가 좁으니 서구 기준으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성격이 한국 조직 문화에서는 왕따나 은따가 되기 쉽다는 거다. 내 성격도 그리 무난하지는 않은데... 참 서글픈 일이다.
요즘은 투명인간에 둘러싸여 지내는 것 같다. 어디에 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바이러스 때문에 어디 갈 수도, 누군가를 만날 수도 없다. 어쩐지 투명인간과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만 같다. 게다가 이 투명인간은 부지런하게도 스스로를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공자님이 봤으면 아주 칭찬하셨을 인물(?)이다. 책이나 영화에서도 업그레이드했다는 투명수트는 못 봤는데, 요 녀석은 숙주의 상황을 주시하며 쉬지 않고 꿈틀꿈틀 변신하는 느낌이다. 숙주에 최적화해서 어떻게든 오래 살려고 아주 발악을 하는 모양이다. 그러한 노력이 의식적인 게 아닌, ‘생.존.본.능’이라니, 더욱 놀랍고도 두렵다. 얼굴이 수시로 바뀌는 중국 ‘변검’도 아니고 이게 무슨...
책이나 영화에 나오는 투명인간을 만나는 경우, 치사율은 50%다. 그가 죽거나 내가 죽거나. 현실에서는 그 확률이 1% 미만(65세 미만의 경우)이니, 투명인간을 만나는 것보다는 현실이 더 낫다고 해야 하나? 아닌가? 퍼져있는 투명인간이 너무 많은 셈이니 현실이 더 나쁜 건가? 쓰다 보니, 더 우울해졌다.
아무튼, 오늘도 무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