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놈의 자존감!!!

by 자두 아줌마


그의 눈에서 얼핏 뭔가가 반짝였다.

내 짐을 가로채고 휙 돌아서서는 내 손을 잡아끄는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나는 어린애처럼 훌쩍훌쩍 울 수밖에 없었다.


그놈의 자존감 자존감 자존감!

백세희 작가님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에 나온 이 표현을 보다가 웃었다. ‘날 것’ 그 자체. 짤막한 이 한 문장에 작가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안쓰럽고, 슬프고, 그리고 정말 많이 공감됐다.


자존감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삶이 이토록 힘든 건 다 네가 자존감이 없기 때문이라고, 세상은 내게 차갑게 속삭였다.

나도 안다구. 근데 그놈의 자존감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구!

세상이 날 부서뜨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 난 그냥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엉엉 울 수밖에 없었다.


“낮은 자존감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인생이 힘들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제대로 된 사랑과 지지를 받아본 경험이 없거나 적다는 점이다.”


<자존감 수업>을 쓰신 윤홍균 작가님이 두 번째 책을 내신 모양이다. 토끼처럼 달아나는 자존감을 쫓아본, 삶에 지친 앨리스들이라면 적어도 한 번은 들었음 직한 얘기다. 진정한 사랑을 받은 기억이 없는 사람은 그런 사랑을 받아봐야 없던 자존감이 생긴다는, 자존감 세계의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 그래서일까? 젊은 시절, 나는 사랑을 찾아 끝없이 헤맸다. 하지만 가슴 속 열등감은 내가 관계 맺는 걸 ‘결단코’ 달가워하지 않았고, 틈틈이 내게 ‘사랑받을 자격’ 따위 있을 리 없다고 속삭였다. 만나면 불안해졌고 쉽게 이별을 예감했고, 그래서 늘 내가 먼저 도망치고는 바보처럼 혼자 울었다.


결혼했을 때의 마음가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난 언제든 끝장낼 준비가 되어 있는 초라한 여전사였다. 둘 사이에 작은 말다툼이라도 있을라치면 갈 곳도 없으면서 늘 가방을 가져다 짐을 쌌고, 그가 그런 날 막아서는 게 일상이었다. 미국에 잠시 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소한 말다툼이었지만 나는 예의 가방을 끌어다 짐을 욱여넣고는 현관문을 나섰다.

‘어차피 끝날 관계였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야.’

미련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뿐. 어차피 난 혼자니까.

여행 가방을 끌며 보무도 당당하게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갔다. 희한하게도 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누군가 내 가방 손잡이를 휙 가로채고는 내 손을 반대 방향으로 잡아끌었다. 그였다.


손을 잡아 빼며 날 내버려 두라고 소리치려 했는데... 순간, 나를 노엽게 바라보는 그의 눈에 얼핏 뭔가가 반짝이는 걸 봤다. 크기는 작지만 이 세상에서 제일 빛나는, 수정처럼 맑은 ‘어떤 것.’ 그건 1000마디 비난보다 더 큰 ‘무언가’였고 그걸 본 나는 아무 저항도,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길을 잃었다가 엄마에게 발견되어 훌쩍이며 엄마 손에 딸려가는 꼬마 아이처럼, 나는 그를 따라가며 고개 숙여 울 수밖에 없었다.


울다 문득 고개를 드니, 내 손을 잡고 짐을 끌며 걸어가는 그의 등이 바다처럼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보물상자가 거기 그렇게, 내 손을 거칠게 부여잡은 그의 따뜻한 손안에 오롯이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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