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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두 아줌마 Jan 05. 2021

그녀의 행복 찾기


중고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책, <1cm 다이빙>.

무심코 집어 들어 책장을 넘기다 소위 ‘대박’을 만났다. 배춧잎이라도 하나 들어있었냐고? 그럴 리가.     

 

어리고 앳된 글씨체. 20대. 왠지 30대는 절대 아닐 것 같은 젊음의 풋풋함이 묻어나왔다. (아, 30대도 물론 젊다. 하지만 20대 때보다는 경험도 많고 연륜도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책에는 군데군데 ‘행복 찾기’를 위한 질문들이 나와 있었는데, 어느 이름 모를 아가씨가 예쁜 필체로 일일이 답을 적어 놓은 걸 발견한 거다. 그날은 그냥 구경이나 하려고 들어간 거였는데 여기저기 끄적거려진 책을 군말 없이 결제하고 서점을 나섰다.      


1. 스마트폰보다 재미있는 게 있나요?

  - 재밌다기보다는 요새 노력 중인 것

     1) 책 읽기

     2) 조용한 카페에서 혼자만의 시간 갖기

그 밑에는 ‘자세히 생각해 보니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아직은...’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랑 취향이 비슷하네, 혼자 중얼거렸다. 아, 노력 중인 거구나. 하긴, 나도 요즘은 스마트폰이 더 재미있기는 해.     


2. 다음에, 다음에 하면서 미뤄왔던 거 있나요?

  - 일본어 공부

바로 아래에 미룬 이유가 달려 있었다. ‘어려워지는 것이 두려워서 1년 넘게 미룸.’ 

어? 나도 20대 때 일본어 한 달 배우고 그만뒀었는데... 묘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이런 걸 ‘시공을 가로지르는 세대 공감’이라 하는 건가?     


3. 내가 나에게 주고 싶은 선물 리스트?

  - Myfirstsony 워크맨(이미 삼), 아날로그 감성을 느끼고 싶어서

  - 구찌 지갑(이미 삼), 이건 작년부터 사고 싶었다고요. ㅠㅠ

애교 섞인 볼멘소리가 마치 내게 하는 투정처럼 들렸다. 혹시 미래에 내가 볼 걸 미리 알고 이렇게 쓴 건가? 그만, 그만. 요즘 타임슬립 드라마 너무 많이 봤나 보다. 그나저나, 워크맨? 이거 나 어렸을 때 출시된 제품인데... 젊은 세대에게는 구닥다리 상품이 ‘신상’이라더니, 진짜 그런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아날로그 인간'이 '아날로그 감성을 느끼고 싶은 인간'을 만나 반가웠다.


4. 버리고 싶은 나의 모습 한 가지?

  - 완벽주의자의 모습

  - 실수하면 자책부터 하는 모습

나네, 나. 내 모습이네. 나이 들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문득 뭔가가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첫 직장 사수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했던 '생각했던 것보다 일을 잘 못하더라'는 코멘트였다.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것도 수치스럽고 존경하던 사수를 실망시킨 나 자신이 몸서리치게 싫어서, 퇴근 시간인데도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는 그 안에서 눈물 콧물 다 쏟았던 기억.  그래도 그 발언 때문에 내가 이를 악물고 배웠으니 그 사수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니, 나한테 조용히 조언한 것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얘기한 건 하나도 고맙지 않다. (사실 그땐 나도 어렸고 그도 어렸다. 나는 20대, 그는 30대)   

  

5. 작지만 내 모습대로 살아본 순간이 있나요?

  - 아쉽게도 생각이 나지 않아요...     

마지막 (...) 부호가 안쓰러웠다. 뭔가 쓰고 싶은데, 이렇게 넘어가고 싶지 않은데, 그런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아쉬움. 서글픔. 나도 20대 때 그랬었다. 공부도 일도, ‘내 인생’이 아닌 남의 인생을 사는 것 같았다. 대학교 원서 접수도, 입사 지원서도 다 내가 직접 썼는데, 내 인생에 내가 ‘주인공’이라는 느낌이 없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지금도 가끔 엑스트라다.     


5. 자소서에 쓰지 못한 당신의 장점은?

  -

어? 왜 없지? 자소서에 장점을 다 쓴 건가? 다행이네. 

자소서에 자기 장점을 당당하게 나열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늘 쑥스러웠던 것 같다. 난 이걸 잘해, 이것도 저것도 다 내가 최고로 잘했어. 그렇게 잘하는 것 같지 않은데 그걸 뻥튀기해서 쓰려니 머리엔 쥐가 나고 팔뚝엔 닭살 돋고 손발은 한껏 오그라들었다. 때로는, 타인이 주인공이었던 상황을 내가 주인공이었던 상황으로 돌려야 했다. “네 의견은 뭐니?,”라고 물어봐 주는 교육을 받지 못한 나로서는 그 상황이 곤혹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덕분에 글짓기 능력은 많이 향상되었을 듯. ‘자기소개’라기보다는 내가 주인공인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한 기분이었으니까.     


6. 나쁜 상사에 대해 얘기해 볼까요?

  - 너무 예민해요. 돈은 조금 주면서 제가 다 하길 바라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잖아요. 본인의 실수엔 

    관대하면서 제 실수엔 정말 예민하답니다.

맞아, 맞아. 상사들은 왜 하나같이 다 그렇게 까다롭고 못돼 먹었는지 몰라. 내 상사 중 하나는 내가 일은 잘하는데(일 잘한다는 얘기는 그 상사가 내게 직접 얘기했던 것임) 개인적으로 맘에 안 든다고 고과를 엄청 낮게 주는 바람에 나중에 아주 애를 먹었다니까.


7. 현재 이 책을 읽고 일어난 변화가 있다면?

  -

답이 없었다. 하긴, 한 시간이면 후루룩 다 읽을 분량의 책을 읽다가 중간에 벌써 ‘변화’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그러나 어쩐지 '변화'를 바라는 그녀의 소망이 오롯이 그 빈칸에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쓰고는 싶은데 바뀐 게 있는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보고서도 아닌데 강제로 짜내기는 좀 억지스럽고. 

1cm라도 옆으로 이동하고 싶은 그녀의 바람이 거기 그렇게 하얀 종이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누군가의 행복 찾기.

글씨에서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묻어나왔다.

20대 때, 난 행복을 못 찾았었는데... 새삼 궁금해졌다.

그녀는 찾았을까?

눈을 감고 간절히 기도해 본다.

그녀가 지금쯤은 그걸 찾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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