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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두 아줌마 Jan 10. 2021

'여성 AI 성희롱'과
'길고양이 죽이기' 공통점은?


20대 여성 캐릭터 AI ‘이루다’에 행해지는 성희롱이 요즘 이슈가 되고 있다. 자신만의 갈라테이아를 만들고 싶은 욕망의 잘못된 분출이라느니, 감정 없는 AI를 향한 단순한 재미 이상은 아니라느니 갑론을박 논쟁도 많은 모양이다. 동시에, 길고양이를 잔인하게 죽이고 그 동영상을 공유하는 사람들도 있다. 참 요지경 세상이다.     


그렇다면, ‘여성 AI 성희롱’과 ‘길고양이 죽이기’의 공통점은?

약자에 대한 일종의 ‘폭력’이다. 내가 쉽게 어찌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존재를 향해 가해지는 ‘지배욕’, ‘정복욕’. 근대 서양 제국주의가 혈안이 됐던 땅따먹기, 그보다 훨씬 오래된 로마 시대 검투사 경기와 근원적인 면에서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럼 ‘여성 AI 성희롱’과 ‘길고양이 죽이기’를 인터넷에 올리면?

그건 조금 성격이 다른 ‘인정 욕구’의 문제가 된다. ‘나 봐라~ 나 정말 대.다.나.지?’ 외치는 소위 ‘관종’이 되는 거다. 페이스북의 ‘좋아요’ 버튼을 갈구하는 마음과 똑같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그것들을 인터넷에 올릴까?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나는 무엇인가? 왜 여기에 있는가?’ 하는 가장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기 위해 그들이 택한 방법이다.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 틈에서 안락함을 느끼고, ‘우와~ 당신 짱!’ 하는 칭찬을 받으면 기분까지 좋아진다. 더이상 외롭지 않고 다시 ‘살만하다’는 희망을 얻게 된다. 

마치 삶의 의미,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은 것만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나의 존재 이유를 내 눈이 아닌 남의 눈 속에서 찾을 때, 결국 그 ‘인정’은 공허함만을 남기게 된다. 

그래서 존재의 의미는 힘들어도, 시간이 걸려도 자신의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내 마음은 내가 제일 잘 돌봐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살다 보니 내 마음이 내 거가 아닌 것 같은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깨달은 건, 내 마음은 누구의 것도 아닌 '내 소유물'이라는 거다.

공유가 불가능한 ‘나만의 것’이라서 내가 누구냐고, 왜 여기에 있느냐고 남에게 물어봐야 헛일이다.

내가 태어난 이유, 내 존재의 의미는 내게, 내 마음에게 물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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