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누가 하는가
“경찰에서 수사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구역질이 난다.
하지만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면 결국 죽을 때까지 이 분노를 짊어지고 가야 한다.
지나간 세월은 어떻게 할 수 없는데,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 (화성 연쇄 살인 누명을 쓰고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윤성여님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
속물인 나로서는 그 깊이를 헤아려 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용서’라는 게 가능한 걸까.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는 자신을 위해 그에게 고통 줬던 사람들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죽을 때까지 증오로 불타오르며 살고 싶지는 않다고...
그의 말이 맞다.
누군가를 향한 증오와 분노는 결국 내 몸뚱어리를 화르륵 태워버린다. 내 발등, 내가 찍는 거다.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그랬다.
상처를 준다고 받니? 왜 받아!
그 말이 내게 도움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누가 상처를 주면 언제나 그걸 덥석 받아 가슴에 품고는 그 상처가 쓰라려 혼자 울고 욕하고 화내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 켜켜이 상처가 쌓이면 그제서야 마음의 문을 철커덩 소리 나게 닫았다. 두껍고 육중한 쇠문이라 절대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용서할 수 없었다. 그 사람들을.
그러나, 가끔 그들을 향한 분노로 숨쉬기조차 힘들 때면 스스로 느꼈다.
이 증오가 날 삼켜버리고 있다는 걸.
그들을 향해 하얗게 타오르는 불길의 갈라진 혀가 지금 날 감아올려 태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용서는 내 것이 아닌 신의 영역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용서는 더 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미움의 대상보다 더 크기 때문에, 더 성숙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어떤 것.
상처 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고귀하고 신성한 어떤 세계 말이다.
억지로 용서하고 싶지는 않다. 아마 그런 게 가능하지도 않을 거고.
하지만 어쩐지 아주 조금 빼꼼히 열린 문틈으로 살짝 신의 세계를 엿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나간 세월을 원망만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제게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보다 다가올 미래가 더 중요하거든요.” - 윤성여님
자신을 위해, 미래를 위해 그는 상처 준 이들을 용서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이제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는 큰 사람이다.
내가 고개를 쳐들고 까치발을 서도 그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웅장한,
산 같은 거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