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HR Head 직책은 고되지만 나름의 재미와 의미도 있습니다. 조직 안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는 재미, 그리고 사업을 함께 만들어가는 보람과 의미. 이렇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네요.
적지 않은 팀장, 팀원들이 있기 때문에 Head인 제 지시가 일사불란하게실행으로 이어지는 것을 자주 봅니다. Head로 성장하고 싶어하는 신입 후배분들께서 저를 마치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대접해 줄 때도 있습니다. 재미있죠.
CEO님과 함께 주요 보직의 인재배치를 결정하고 각종 인사결정을 하기 때문에 사업을 만들어간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새롭게 발탁한 리더가 탁월한 성과를 보인다거나, 영입한 인재가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할 때의 보람도 큽니다. 의미있죠.
그런데 말이죠.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대기업은 크게 2가지의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 회사 전체적으로 변화 수용력이 낮다.
둘째, 증명해야 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크다.
변화 수용력이 낮다는 건 무슨 말일까요?
성공한 기업일 수록 기존의 성공방식을 잘 놓지 못합니다. 사업도 마찬가지지만 인재경영, HR을 대하는 관점도 대개 그렇습니다.
작게 예를 들어보면, 인재를 모으고 선발하는 과정에서의 도구와 시스템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도요타 칸반을 모태로 한 UIUX의 채용 플랫폼들이 Saas 형태로 빠르게 등장하고 있고, 일하는 방식과 노하우도 급변하고 있죠.
그런데 대기업은 대개 예전의 올드한 시스템을 그대로 쓴다거나 (시스템을 뒤엎는다는 것은 마치 현재 사는 집을 리모델링 맡긴 후 몇 달 간, 다른 살 곳을 구해야하는 막대한 불편함과 비용이 소모되기 때문이죠.) 외부의 일하는 방식의 변화수용을 거부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기존처럼 했어도 잘 했어. 왜 우리가 외부에 맞춰야해?
라고 물으면 사실 더 이상 설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하나의 큰 함정이자 온실과도 같습니다. 예전처럼 일해도 회사가 망하지 않는다면 개인은 살아남기에 학습과 성장에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외부는 구글 문서나 MS팀즈나 Saas 플랫폼을 통해 가볍고 빠르게 협업하든 말든, 대기업에서는 기존처럼 PPT와 이메일 소통에 익숙해져 있으니 그 방식 그대로 일해도 누가 뭐라 안 하는 거죠. 이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외부의 변화를 자꾸 거부하는 사람들만 남게 되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는 분명 있습니다. 더 좋은 프로세스, 더 효과적인 도구는 계속 도입해 보고 써봐야 하는 것일 겁니다. 휴대폰이나 태블릿을 최신형으로 바꿔나가는 것과 이치가 같습니다. 아무리 잘 관리한 자동차라도 자율주행 시대가 오면 갈아타야 하는 것과도 같겠죠.
증명해야 하는 시간과 에너지 소모가 크다.
대기업이 될수록 사업부는 다양해지고 책임자의 수와 위계가 복잡해집니다. 자연스럽게 사업부 단위의 실적과 질적인 전진을 점검하고자 하는 중앙의 (투자자, 오너) 니즈가 강해지죠. S그룹의 계열사 사장단이 가끔씩 모처에 모두 모여 회의를 했다는 기사를 보셨을 겁니다.
보고를 잘해야 하고, 그 보고는 영역별 책임자들의 "저 잘하고 있어요. 관심 꺼주세요 or 승진시켜 주세요"가 가득 담겨 올라갑니다. 그 보고의 질을 보면서 중앙은 안심하죠.
더 나아가면 미x래전략x 과 같은 소위 강력한 중앙통제집단도 등장하게 됩니다. 사업을 하는 건지, 보고를 하는 건지 헷갈리는 경지로 점차 진입하게 되는 거죠.
저도 어느 순간 시간사용을 기록하고 측정해보니
중앙부서에 보고하는데에 시간의 60~70퍼센트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HR본연의 업무에 대한 고민보다는 보고서의 문장과 단락 하나에 집중하게 됐죠.
다행히 2년 넘는 검증의 기간 동안 잘 살아남았고,
삶을 완전히 갈아넣는 모습만 보여준다면 임원도 얼마남지 않아 보였습니다.
(차장급 정도 되시면 회사 내에서 본인의 다음 스텝이 대략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십니다)
그런데 5년 후, 10년 후를 생각해보니 고민이 됐습니다.
아직 젊기에 좀 더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해보고 싶었고
변화하지 않는 갇힌 조직 안에서의 제 성장도 슬슬 걱정이 됐습니다. 매주 반복되는 증명과 보고의 시간도 점차 지치게 만들었구요.
오랜 고민 끝에 결심을 합니다.
우물 안 큰 개구리는 되지 말자.
기회가 오면 도전해 보자.
그리고 마침 괜찮아 보이는 기회가 왔습니다.
IT 스타트업이었고 완전히 새롭게 세팅해야하는 곳이었죠.
B2C에서 오랜 기간 있었기에 해당 회사가 B2B인 점도 도전욕구를 자극했습니다.
그렇게 이직의 결심 후 1달만에 모든 것이 결정됐고
스타트업 HR Head로 살아가게 됩니다.
나와보니 어느 조직/산업이나 장단점이 있습니다.
다양한 경험과 인재를 만나보는 것은 즐겁지만 체계없음과 여러 문제를 접할 때면 대기업 때가 그립기도 하죠. ^^
저의 HR Head 성장기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스타트업에서의 좌충우돌 성장기를 써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