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의 기대는 없다.

by Seb

한창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 선생님들이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지금 하고 싶은 것들은 전부 대학 가면 다 할 수 있어! 조금만 참아!"


단지 그 말 때문만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오랫동안 많은 것들을 참았다. 하고 싶은 게임을 참고, 좀 더 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더 자고 싶은 몸을 깨웠다. 그러면서 언젠가 이 입시 생활이 끝난다면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뭐든 할 수 있는 어른이 되겠지?라고 말하며 미래에 대한 환상을 조금씩 키워왔다. 사실 환상이라기보다 근거 없는 믿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근거는 없었더라도 몇 년만 지나면 모든 걸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믿음은 꽤나 좋은 자극이 되어서 입시 생활을 버틸 수 있는 중요한 버팀목 중 하나가 되었다.


많은 대학생들이 겪는 것처럼 그 믿음이 배신당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등학생 시절 참아왔던 모든 것들을 하기엔 돈도 없고 시간은 더 없었으니 말이다. 특히나 1학년 2학기 때에는 그 배신감이 무척이나 커서 그 무엇에도 마음을 둘 수가 없었다. 뒤늦게 이른바 슬럼프라 불리는 것이 온 것인데 다행히 막 절정이 시작될 때 군대로 도망갈 수 있었다.


복학한 뒤에는 새로운 믿음을 가졌다.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한다면 여유도 생기고 시간도 생기니까 이번엔 정말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말이다. 배신을 당해놓고 또 그런 믿음을 가지다니 참으로 아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지만 덕분에 잡념이 사라져 온전히 취업 준비에 전념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믿음은 또다시 배신당했다. 시간은 늘 부족했고 무엇이든 하기에 체력 또한 부족했다. 그래도 두 번째로 겪는 배신이므로 첫 번째만큼 아프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분명 멍이 들 만큼 아프긴 하다. 이렇게 미래에 대한 기대를 총 2번 품었는데 2번 모두 실패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늘 기대에 못 미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내 삶이 과연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 것인가라고 말이다. 그러면 이번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이는 물론 근거 없는 대답이었지만 꽤나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아 나를 괴롭혔다. 무얼 해야만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분명 겉으로 보기엔 문제가 없는 삶인데도 왜 나는 계속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것을 찾고 있는 것일까. 내가 너무 과한 욕심을 바라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이젠 더 이상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지 않는다. 또다시 배신을 당한다면 이번엔 정말 결정적으로 무너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결국 기대한 만큼의 삶을 살 순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또다시 어지럽히게 될 것이 뻔한 마음은 더 이상 품지 않는다.


대신에 요즘은 그저 좀 멍하니 지낸다.


과거에 내가 지금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별로 생각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기대도 딱히 없으니 멍~할 뿐이다.


그저 일어나서 전 날에 사 온 과일을 먹고

그저 출근을 하고

그저 출근길에 책을 읽는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별다른 계획 없이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일들을 한다.

이후엔 이것의 반복이다.


조금 무미건조하긴 하지만 반복은 빠르게 습관이 되었다. 그리고 습관적인 행동을 하지 못할 때 괴로운 것처럼 단조로워 보이는 일상임에도 나에겐 소중히 하고 싶은 일상이 되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보다

지금 출근 버스 안에서 책 읽는 이 시간이 더 소중하고

지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더 소중하며

그렇게 일상을 보내고 만족스러운 잠을 청하는 것이 훨씬 나에게 필요한 것이 되었다.


무언가를 향해 열심히 하던 열정이 때론 그리울 때가 있지만 적어도 불만족감은 많이 줄었다.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정말 정답일까 하는 물음은 여전히 있지만 이전보단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그리고 언젠가 때가 된다면 또다시 이전만큼의 열정을 불태울 만한 무언가가 오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한다. 그것이 뭐가 될지 모르겠지만 또다시 온다고 하더라도 이젠 그것이 내 삶을 지극히 행복하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그저 일상 속의 추가적인 자극 정도랄까.


그것이 오기 전까진.... 그저 지금처럼 아무런 기대 없이 그리고 실망 없이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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