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겠다.

강윤후 시집 [다시 쓸쓸한 날에]

by 변미용

기분이 쓸쓸하거나 무언가 가슴이 먹먹할 때

책장 앞에 서서 한 줄로 나란히 꽂혀있는 시집들의 제목을 훑어보곤 한다.

시집의 제목만 몇 권 훑어도 시인들의 감성이 조금은 내속으로 옮겨지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십대였던 90년대에 시창작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시집을 사모았었다.

졸업 즈음에 노량진에서 임용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툭하면 근처의 서점에 들러 여러 권의 시집을 읽고 사고 했었고...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시의 '깊이'를 모르면서 그저 문학소녀의 감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국문학도의 치기로 겉핥기식 '시읽기'를 했다.

그래서 마냥 어려웠고,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시는 내게 더 어렵게 다가왔었다. 결국 가끔씩, 아주 가끔씩 문학과지성사나 창작과비평에서 나오는 시집들을 구입해서 후루룩 훑어보는 것으로 시에 대한 애정을 표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책장 앞에서 시집 제목을 훑던 내게 이끌려 선택된 시집이 한 권 있었다. 바로 강윤후 시인의 [다시 쓸쓸한 날에]이다. 시집 몇 페이지를 그 자리에 서서 펼쳐 읽던 나는 시 한 편을 읽다가 갑자기 가슴이 쿵하고 울리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경험을 했다. 시가 내 삶속으로 미친듯이 달려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한밭, 그 너른 들에서 / 강윤후
나를 표시하는 몇 개의 숫자들과 더불어 산다
간혹 집 전화번호나 통장 비밀번호 같은 것을 잊고서
청어 대가리처럼 어리둥절해 한다

먼 도시의 지인들 사이에 떠도는
나에 대한 소문들을 듣기도 한다
소문에서 나는 무엇에 대단히 화가 나 있거나
누구를 아주 미워한다 행복한 가장이 되어
세월을 잊고 세상일마저 모른 채 지낸다고도 한다
소문만으로도 내 근황이 충분하므로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듯 일없이 달력이나 넘겨본다

아무 징조도 없이 계절이 바뀌고 그러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하려는데 문득
자동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이 너른 들판 어디쯤에선가 나도
그렇게 시동이 꺼질 것이다
갑작스레 멎을 것이다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는 힘들다.

그저 나에 대한 평판은 남에 의해서 이렇게 저렇게 사실 그대로인채로, 혹은 각색되기도 하고 변질되기도 하면서 전해진다. 그러나 그런 일쯤...그래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다.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어느날 아무 시점에 내 인생의 시동이 꺼질 수도 있다...갑작스레...그럴 수 있다. 그게 두려웠다.

최근 외할머니의 갑작스런 사망과 아버지의 응급실행을 겪었다. 삶과 죽음이 한순간에 결정되는 것을 보며, 아직 보낼 준비도 갈 준비도 되지 않은 내자신의 외로움이 처음으로 두려워졌었다.


며칠 전 시에서 느낀 강렬한 무언가가 두려움인지, 삶에 대한 자각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 내가 시의 깊이를 어느정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그동안 나이만 들었지 마음은 예전 그대로라고 생각해왔는데 내맘과 정신도 여물어가고 있었나보다.

나이가 든다는것.

아직 마흔넷이지만 좀더 멋지게 나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윤후 시인의 '불혹 혹은 부록'을 실어본다.


불혹 혹은 부록 -강윤후-
마흔살을 불혹이라던가
내게는 그 불혹이 자꾸
부록으로 들린다 어쩌면 나는
마흔 살 너머로 이어진 세월을
본책에 덧붙는 부록정도로 여기는지 모른다
삶의 목차는 이미 끝났는데
부록처럼 남은 세월이 있어
덤으로 사는 기분이다
봄이 온다
권말부록이든 별책부록이든
부록에서 맞는 첫 봄이다
목련꽃 근처에서 괜히
머뭇대는 바람처럼
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겠다.


권말부록이든 별책부록이든 나는 부록을 좋아한다.

~괜히 머뭇대는 바람처럼 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겠다.


근처에 머뭇대는 따스한 바람이 불어온다면,

나 오랜만에 두팔 벌려 맞아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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