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의 서재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문화 심리학-김정운

by 변미용

가을이다.

내게 가을은 조심해야 할 계절이다.

십대 후반부터 내게 찾아온 '가을'이라는 병은 친구들이 다 눈치채도록 앓은 뒤에야 끝이 나곤 했었다. 지금은 나이를 먹은 만큼 '가을'을 숨기며 앓을 수 있는 노하우가 생겼을 뿐, 여전히 가을은 내게 앓아야 할 불치병 중의 하나이다.

아침 출근 길 안개 속에 피어있는 화사한 꽃들을 보거나, 산 위부터 내려오는 울긋불긋 활엽수들의 몸부림을 보거나, 고운 햇살 속에 농익은 갈빛을 뽐내는 자작나무를 보거나 하면 가슴 속에 울컥울컥 감정 과잉이 몰려온다.

그리고 활짝 문이 열린 것처럼 한바탕 바람이 서늘하게 지나가곤 한다.

마치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은 계란찜마냥 푸르륵 볼록하게 끓어올랐다가 어느샌가 뚝배기의 반으로 푸욱 꺼져버리는 그런 종류의 감정 소모...그게 유독 가을에 심해진다. 그래서 가을엔 마음이 쓸쓸하다. 그리고 외롭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는 제목은 나란 독자를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더 외로워야 덜 외로워진다!'는 역설적인 저자의 표현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선택하게 했다.

'그래 한 번 외로움이 뭔지 어떻게 해야 그걸 잘 활용할 수 있는지 한 번 접해보자...'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이 웃었다.

저자의 발칙한 성적 상상력이 민망해서 웃었고, 50이라는 나이에도 꾸밈없이 솔직한, 그래서 철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서술에 웃었고, 책 속에 삽입된 그림들의 짧은 표현들이 공감가서 웃었다.

저자인 '김정운'은 문화심리학자이다. 독일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뒤 교수를 하다가 돌연 퇴직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화를 전공하고 그림을 그리며 저작활동을 하고 있다. 이 책은 그의 일본생활 동안의 결산이자 격한 외로움의 결실이라고 한다. 내가 책을 읽어가며 느낀 김정운은 한마디로 솔직, 발칙한 사람이다.

도무지 숨기는 것이 없다. 그리고 감정에 너무나 솔직하다.

그에 반해 나는 세상을 너무 진지하게만 대한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인용한 문정희의 시는 내 삶에 대한 반성이다.

생애를 걸었습니다.
그, 러, 나
그동안 나는 너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좀더 즐겁고 가볍게 좀더 깊게 살리라. 그리하여 오늘도 한없이 빈둥거리고 싶다.
앙리에트의 흑백사진 속, 따뜻한 진흙의 방패를 쓰고 잠자지 않고 깨어 있는 한 왕족의 공간에서 무녀처럼 멍하니 앉아 있고 싶다.
-문정희 시집 [남자를 위하여]의 저자 시작노트에서 발췌함
사진을 찾다보니 바다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있는 사진을 발견

저자 김정운이 말하는 한국 사회에서 '고독'은 낯선 단어이다. 고독해서는 안된다. 우리 문화에서 고독은 실패한 인생의 특징이라고 한다. 내 경조사가 외로워보이면 안되기 때문에 아직 건강할 때 남의 경조사에 죽어라고 쫓아다닌다. 우리가 바쁜 이유 또한 고독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고독 저항 사회'이기 때문이란다. 반면 고령화에 일찍 진입한 일본이나 서구 대부분의 나라에서 고독은 당연한것이란다.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어도 쑥스럽지 않고 혼자 돌아다녀도 하나도 안 불편한 사회...즉 '고독 순응 사회'. 고독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사회 구석구석에서 느껴진다. 그래. 오래 사는 나라에서 고독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우리나라도 요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혼술, 혼밥'이라는 말이 대세로 등장하고 있다. 혼자 먹는 밥, 혼자 먹는 술이 어색하지 않은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장단과 흑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사회에서는 당연한 수순이겠지. 그렇다면 고독저항사회에 익숙해진 나란 인간형은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

일단 마음부터 다질 일이다. 격하게 외로울 것, 외로움을 견딜 것, 그리고 외로움에 의연할 것.


의미부여는 인본주의 심리학 혹은 현상학적 심리학의 핵심 주제다. 인본주의 심리학은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인간을 설명하려는 행동주의 심리학이나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모방하려는 실험심리학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한다. 자연과학적 방법론으로 설명되는 것은 동물의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282쪽


세로로 쓰인 일어 책을 읽으면참 착해진다.
고개를 쉴 새 없이
끄덕여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까지 끊임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참 많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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