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과 이상에서 현실과 일상으로...
모처럼 시간이 나서 창밖을 오랜 시간 내다 보았다.
매서운 가을 추위가 다녀가서인지 알록달록 가을을 뽐내던 창밖의 나무는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몇 개 안남은 나뭇잎마저 투둑투둑 놓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가슴 시리게 아파왔다.
마치 거울 속에서 푸석푸석해진 얼굴에 늘어나는 주름과 흰머리카락의 나자신을 발견한 것처럼.
아...공허함과 쓸쓸함이 내 밑바닥까지 흐물흐물 나를 녹일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을...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약해지는게다.
방법은? ㅎ그저 창밖을 외면했을 뿐.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예요."
위의 말은 문학동네 수상작이었던 정한아의 [달의 바다]에 실려있는 말이다.
십대에는 정말 많은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는 이루어질 거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이십대에는 꿈이 모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그래도 치열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삼십대에는...삶이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간이 얼마나 감정적인 동물인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사십대에는...창밖을 보다가 외면하다가...하면서 살고 있다.
내가 꿈꿔왔던 것이라...사랑과 삶이 낭만주의에 가까웠던 나는 그래서 어쩌면 더 실망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마치 내 인생이야기를 하려는 듯 하지만, 사실은 알랭 드 보통의 최신작인 [낭만적 연애와 그후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려한다.
알랭 드 보통은 이전에도 브런치에 소개한 적이 있는 [우리는 사랑일까]의 저자이다. 철학을 전공해서인지 그의 작품들은 철학적인 요소와 심리학적인 부분이 적절히 섞여 일상적 연애의 이야기들이 굉장히 지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아래와 같이 구성되어 있다. 아마 아래의 내용으로도 전체적인 흐름이 대략 파악될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읽어보면...이런 흔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글솜씨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1부 : 낭만주의-매혹, 신성한 시작, 사랑에 빠지다, 섹스와 사랑, 청혼
2부 : 그 후로 오래오래-별것 아닌 일들, 토라짐에 대하여, 섹스와 검열, 감정전이, 모든 게 네 탓, 가르치기와 배우기
3부 : 아이들 -사랑의 가르침, 사랑스러움, 사랑의 한계, 섹스와 양육, 빨래의 위신
4부 : 외도-바람피우는 남자, 찬성론, 반대론, 양립할 수 없는 욕망들, 비밀
5부 : 낭만주의를 넘어서-애착 이론, 성숙함을 향해, 결혼할 준비가 되다, 미래
소설과 에세이가 절묘하게 만난 이 소설에서 알랭 드 보통은 이제 낭만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라고 일러준다. 주인공들의 사랑과 결혼은 낭만주의에서 현실주의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서사이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에서 기억에 남았던 구절들을 소개해보도록 하자.
결혼 :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
사랑은 단순한 열정을 넘어 기술.
연인이 '완벽하다'는 선언은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징표에 불과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상당히 실망시켰을 때 그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알기 시작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제 나도 낭만주의의 이상에서 벗어나 현실주의로 돌아와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