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락 숲은 기억한다
이불솜을 뭉쳐놓은 구름이 하늘에 가득했다. 늦가을이라서 기온은 차갑지만 바람 없는 오후이다. 양떼들이 서쪽 하늘로 줄지어 가는 구름은 오래도록 모양을 흩뜨리지 않고 있다. 하늘과 만나는 먼 산들은 멀리서 보면 갈색이다. 가을이라서 갈색이기도하고 이젠 갈 거니까 갈색이다. 구름에 가린 해는 아직도 하늘 높이 있다. 양떼를 몰고 가는 바람이 늦장을 부리는 덕분으로 조각난 하늘 미로들이 태양에게 갈 길을 알려주고 있다.
올해 유독 맑고 투명한 단풍나무 아래에 서서 위를 올려다본다. 하늘을 빽빽이 가린 붉고 노란 단풍잎을 지나온 햇빛이 내 얼굴을 어루만진다. 바닥에도 단풍잎들로 밝은 기운이 넘친다. 메마른 배수로에는 꺼지지 않은 낙엽으로 환하다. 떨어진 낙엽은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보다도 할 말이 더 남았다는 듯 붉다. 더 태울 것이 없어지면 낙엽도 먼지가 되어 흙으로 돌아간다. 까만 숯덩이를 환하게 밝힌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지면 허연 재가 남는다. 어쩌면 털썩 무너질 재에 나무의 결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물기도 색깔도 빠져버려 오그라든 낙엽에는 잎맥이 고스란하다. 봄. 여름. 가을을 열심히 살아온 나무의 자서전이다.
소나무 아래에서 청설모가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한다. 내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오가던 청설모의 성성한 까만 꼬랑지가 움직일 때마다 오르락내리락 까닥댄다. 아이는 분주한 발길을 멈추고 두 발로 몸을 일으켜 선채로 작은 귀 끝을 쫑긋 세웠다.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조그만 얼굴에 경계심이 가득할 것이다. 청서는 소나무 줄기를 타고 쪼르르 위로 줄달음 쳤다. 높은 나뭇가지 위로 올라가서야 아래를 내려다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흔들리는 나뭇가지 끝에서 간당간당 옆 가지로 휙 하고 건너갔다. 앗! 하고 숨죽였던 소리가 내 입에서 나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청서는 까만 꼬랑댕이를 나뭇가지 사이로 감추며 사라졌다.
소나무 아래에는 청서가 까먹은 솔방울 뼈다귀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밝은 갈색 솔잎들이 바닥을 덮은 숲길은 연한 비단을 깔아 놓은 듯 부드럽다. 청서는 솔방울에 붙어있던 단단한 조각들을 앞니로 갉아 버리고 속에 들어있는 부드러운 솔 씨앗을 먹었을 것이다. 솔 씨앗 한 톨 이라고 해봐야 참깨 한 톨 정도밖에 안 된다. 여기저기 떨어진 솔방울 뼈다귀가 꽤 많아도 청설모가 배부르게 먹었다고 할 수 없다. ‘활터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뒷산이 온통 도토리 천지야. 거기로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어’ 라고 고급정보를 알려줄 건데 아이는 도망 가버렸다. ‘아니지 청설모가 어디에 먹을 것이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지. 걔는 솔 씨가 훨씬 더 맛있나봐.’
이 길을 돌아서 가면 작은 오두막이 나온다. 자연학습원에 설치한 쉼터이다. 이곳에서 어린이들이랑 멧돼지 잡기 놀이를 했다. 멧돼지가 그려진 보자기를 둘러쓴 어린이집 선생님이 나타나면 무서워하며 기다리던 아이들이 “뭐야, 가짜잖아요.”
하지만 곧 다른 아이들이
“야, 우리 그냥 속는 척 하자.”
아이들은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눈을 하고 가짜 멧돼지를 쫒아간다. 숲길에 수북이 쌓인 낙엽이 바스락거린다. 이제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수런수런 바스락 소리위로 겨울이 찾아 올 것이다. 척추가 드러나 앙상해진 바스락 숲은 기억한다. 새순 파릇한 봄과 보리수열매 빨간 맛과 메뚜기 뛰던 수풀을. 숲은 자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