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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숲 Nov 29. 2019

나는 아주 작은 애벌레

애벌레는 나비가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산초 잎에 무엇인가 떨어져있습니다. 길고 까만 덩어리에 하얀 얼룩이 묻은 게 새가 똥을 싸놓은 것 같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자 꼬물꼬물 움직입니다. 새똥처럼 위장한 호랑나비 애벌레입니다. 왜 하필이면 산초나무에 살고 있을까요? 산초는 독성이 있는 풀이라서 웬만한 애벌레들은 오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호랑나비 엄마는 독성이 있는 풀에 알을 낳아 붙여놓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독을 몸 안에 축적하면 잡아먹히지 않을 거란 계산인 거지요. 산초 잎을 먹고 자란 애벌레는 산초 독에 내성이 생겨 천적의 위험에서 벗어나 나비로 우화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산초 잎에 낳아놓은 알을 몇 개 가져와서 직접 키워보기로 합니다. 산초 새순에서 좁쌀 만 한 알을 찾고 먹이로 줄 산초도 몇 가지 잘라왔습니다. 애벌레를 키우면 할 일이 많아집니다. 애벌레가 먹을 신선한 산초를 구해서 갈아주고, 애벌레 똥을 치우고, 햇볕에 통을 내어놓고 따뜻한 서식환경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알이 까매지더니 먼지만한 까만 애벌레가 나왔고,  먼지애벌레는 새끼손톱 길이만큼 커지더니 내가 발견했던 모양의 새똥애벌레가 되었습니다. 야생에서 혼자 힘으로 살아남으려 위장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애벌레는 자기 몸을 새똥처럼 만듭니다. 새똥무늬만으론 부족했는지 작은 돌기를 뾰족뾰족 세워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아남으려 애씁니다.    


호랑나비 3령 애벌레


엄마가 키우는 애벌레를 막내가 한참을 들여다봅니다. 왜 저런 새똥무늬를 가지게 되었는지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그럼 안 잡아 먹혀?”
 “안 잡아먹으면 새들은 굶어죽게. 거의 다 잡아먹히지”

“너무하네. 아직 날개도 안 생겼는데.”

   

며칠 뒤 애벌레는 꿈틀거리며 새똥 옷을 힘들게 벗었습니다. 작은 옷을 벗으니 안에서 초록색 줄무늬를 가진 전혀 다른 아이가 나왔습니다. 저 작은 허물 안에서 어떻게 버텼을까 싶은 크기의 초록색 애벌레는 허물을 벗느라 힘들었는지 움직임이 없습니다. 종령이 된 애벌레는 색깔도 진해지고 줄무늬도 선명해졌습니다. 나름 뱀 무늬를 흉내 내고 무서워 보이라고 가짜눈알도 커다랗게 만들었건만 눈이 큰 캐릭터가 오히려 겁보 같아 보이기만 합니다.


“엄마, 재는 지난번 걔랑 다른 얘야?”
 “음, 같은 얘인데, 다른 얘야. 옷을 벗으면서 살아가는 방법이 좀 달라졌거든”
 무슨 소리인가 막내는 내 얼굴을 쳐다봅니다.
 “새똥무늬에서 뱀 무늬로 바뀌었잖아. 조금 더 센 척 하는 거지.”

“저런다고 안 잡아 먹혀?”

“잡아먹히지”
 딸은 관찰 통을 보면서 누구에겐지 모르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괜찮아”    


막내는 어릴 땐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에게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다 이야기하고 친구, 선생님 이야기 등을 끝없이 들려주었습니다. 어떨 땐 귀찮을 만큼 말을 많이 하는 아이였습니다. 다정하고 착하기 그지없던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서 말도 하지 않고 자기 방문을 닫고 들어가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아이의 뒷모습에서 찬바람이 쌩쌩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활발한 애벌레였던 아이는 번데기가 되었습니다. 나는 변한 아이의 모습이 너무 낯설고 서운했습니다.

   

관찰 통을 숲 사무실로 옮겼습니다. 날마다 엄청난 식욕으로 산초 잎을 갉아먹던 애벌레가 먹지도 않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고치를 틀 때가 된 것입니다. 고치를 틀기 전 애벌레는 많은 양의 물똥을 배설합니다. 몸무게를 가볍게 하여 번데기 상태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열흘 정도 지나 번데기의 색깔이 거뭇해졌습니다. 오늘 나올까요? 내일 나올까요?    

 마지막 단계인 5령단계. 뱀모양 줄무늬와 가짜눈으로 위장한 모습


딸이 고등학생이던 어느 날 야자학습을 마친 늦은 밤에 그림책을 들고 와서 읽어달라고 했습니다. 어릴 때처럼 내 무릎을 베고 누워서 ‘엄마한테 좋은 냄새가 난다.’ 면서 내가 읽어주는 그림책을 봤습니다. 번데기 속에서도 애벌레는 가끔 꿈틀거리며 자세를 고치는 것처럼,  딸아이도 고치 속에서 ‘나 여기에 있어!’ 하는 신호를 가끔 보내왔습니다.  


애벌레는 자기 몸에서 실을 내어 고치를 만들고 이주일 정도 번데기 상태로 지냅니다. 가끔 꿈틀대면서 '나 여기에 있어' 하고 신호를 보냅니다.


  

주먹 쥔 나뭇잎이 손바닥을 쫙 펼쳐 시원한 그늘을 만드는 초여름. 초록 공장에는 먹을 것이 아주 많습니다. 보리수 꽃에 벌들이 꽃 꿀을 빠느라 바쁜 그날 아침. 나는 마음이 바빠지고 두근거렸습니다. 나비가 나왔을까? 숲 사무실 문을 열었습니다.


검정 그물무늬가 선명한 네 장의 날개를 말리고 있는 호랑나비는 내가 지른 ‘어멋!’ 소리에 날개를 움찔하고 놀랐습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우화 장면은 정말이지 신비하고 감동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뒤뜰로 나가는 문을 열자 빛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나비는 붙잡고 있던 가지에서 떨어져 책상 벽에 붙었다가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더니 기어서 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혹시 ‘날지 못하나.’ 하고 마음을 졸였습니다.


나비는 뜰 아래로 떨어지더니 돌 위에 올라가 따뜻한 햇살에 날개를 활짝 펼쳤습니다. 결 고운 나비비늘, 검은 줄무늬, 콕 찍은 주황과 파랑 점의 날개를 가만히 흔들며 힘을 모았습니다. 잠시 뒤 호랑나비는 날개를 팔랑거리며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아침 하늘에 나비가 납니다. 파란 하늘을 지나 모과나무 위로 날아간 호랑나비는 내 시야를 벗어났습니다.

    

무사히 날개돋이에 성공했습니다

집을 떠나 타지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가 가끔 집에 옵니다. 어릴 때의 껍질을 벗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모양과 빛깔을 찾아가고 있는 딸은 번데기의 어디쯤일까요? 미약하고 희미하지만 꿈을 향해 가는 딸의 모습은 대견합니다. 고치에서 나오는 나비를 도와줄 수 없듯이 혼자서 힘겹게 껍데기를 깨는 아이에게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날 애벌레에게 ‘괜찮아.’ 라고 말했던 것처럼 스스로를 격려하고 있을 딸을 응원합니다. 아주 작은 애벌레로 온 내 아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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