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엉이숲 Feb 10. 2020

다시 봄을 기다리며

당신에게 좋은 일이 생기길 바랍니다

    

계룡산의 능선에 생선뼈 같은 빈 나무들이 촘촘히 서있는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빈 나무들 너머로 하늘이 흐리다. 겨울 숲은 뼈대를 드러내고 누워있는 거대한 척추동물 같다. 걸을 때마다 나의 들숨과 날숨이 입과 코에서 뿜어져 나오며 하얀 김이 공기 사이로 퍼져나간다.

    

청년기의 계룡산은 거칠다. 산길은 가파르고 맨땅보다 바위돌이 탐방로를 따라 보도블록처럼 깔려있다. 길옆으로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겨울 산에 또렷하다. 넓게 흐르던 물이 너른 바위 돌 위를 힘차게 흘러내리다가 모래로 이어지는 길에 이르러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된 거지. 모래층이 물줄기를 빨아들여 감쪽같이 물 한 방울 없이 감춰버렸다. 땅 밑을 숨어 흐르던 물줄기는 다시 자갈층 길을 만나 심장소리도 세차게 땅 위를 흐른다.   

 

감태나무 이파리가 겨울눈을 껴안고 바람에 흔들리며 달랑달랑 소리를 낸다. 지난가을 무리 지어 피었던 사위질빵 씨앗들이 그대로 말라버려 햇볕을 받아 하얗게 빛난다. 햇볕이 드는 양달 쪽은 흙도 말랑하고 난로 가처럼 따뜻하다. 작아서 있는지도 모르는 꽃들이 물결처럼 반짝이는 걸 보고 있으니 모든 생명들이 빛을 받으면 이렇게 환할 수 있다는 희망이 일렁인다. 햇볕을 쪼이며 걷는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작은 웅덩이들을 감춘 오솔길에 이르면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응달쪽 웅덩이는 얼어있다. 아래로 내려가 얼음에 발을 디뎌본다. 얼음 갈라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 얼음 아래 진한 고동색 낙엽이랑 연한 갈색 낙엽, 맑은 모래 알갱이까지 선명하다. 어머, 이건 뭐지? 뭉글뭉글 투명한 순대 같은 고리가 얼음 아래에 보인다. 고리 속에 까만 점들이 또렷하다. 도롱뇽의 알이다. 봄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도롱뇽이 벌써 겨울잠에서 깨어 알까지 낳아 바닥 돌에 붙여 놓았으니 이걸 어쩌면 좋을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겨울답지 않게 영상의 날씨가 계속되었었다. 그 바람에 도롱뇽이 일찍 깨어 번식을 시작한 것이다. 조금 이르지만 물 밑은 얼지 않아 바깥보다는 따뜻하다. 게다가  뭉글한 알집도 알들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으니 알들은 보이는 것보다는 괜찮다. 도롱뇽은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왔는데 얼음만 보고 내가 지레 놀랐다.   

 


건너편 웅덩이에는 햇빛이 환하게 비친다. 물은 얼지 않았다. 이곳에도 낙엽이 가라앉은 돌 옆에 도롱뇽 알들이 있다. 동그라미 두 개가 얇은 막으로 이어져 8자 모양으로 붙어있다. 물속에 매끄러운 자갈돌들이 햇볕을 받아 투명하다. 여기 어디쯤에 도롱뇽이 숨어있을 것이다. 커다란 돌을 몇 개 들추자 긴 꼬리를 말아 몸에 붙이고, 주둥이가 동그랗고 눈이 튀어나온 낙엽 색깔 도롱뇽이 깜짝 놀란 듯 몸을 낮춘다. 오동통한 몸통에 앞 발가락 네 개 뒤 발가락 다섯 개가 오종종하고, 옆으로 납작한 꼬리가 매끈하게 휘어진 도롱뇽은 내 손바닥 반만 하다. 낙엽 위에 올려 자갈 밖으로 꺼내 도롱뇽을 관찰했다. 도롱뇽은 꼬리를 튕기며 곧장 돌 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입춘 늦추위가 더 맵지만 알들은 날이 풀리길 기다렸다가 깨어날 것이다. 먼저 깨어난 만큼 포식자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잘 자랄 것이다.

   

부지런한 갯버들은 벌써 강아지 꼬리 같은 꽃 꼬투리를 내밀었다. 솜털이 돋아난 버들 꽃이 겨울바람에 까만 털을 웅크린다. 뼈대만 남은 겨울나무들은 봉긋한 겨울눈을 긴 가지 끝마다 매달고 있다. 아직 잎을 틔울 때가 아니라는 듯 겨울눈 잎 비늘들은 완고하게 입을 다물었다. 저쪽 가지 끝에 과자 가루로 보이는 것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가까이 가서 보고 나는 감탄했다. 세상에! 가지 끝 새순이 돋아날 자리 옆에 자잘한 벌레 알집이 다닥다닥했다. 고치 속에서 겨울을 지내고 깨어난 애벌레는 새로 돋아난 나뭇잎을 맛있게 갉아먹으며 자랄 것이다. 나무 끝에서 삶과 죽음이 함께 봄을 기다리고 있다.    


내려오는 길에 단풍나무 매끈한 줄기에 뜬금없이 상수리 낙엽이 붙어있는 것이 수상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낙엽 끝과 나무줄기 사이를 거미줄 실크가 겹겹이 덮여있다. 무당거미가 알을 낳고 알집을 덮어줄 실크 이불을 쳐놓은 것도 모자라 위장막 역할을 해줄 상수리 낙엽까지 붙여놓은 것이다. 어미는 알을 낳고 죽었지만 치밀한 모성애 덕에 새끼 거미들은 반짝이는 봄 햇살을 맞이할 것이다.     

한 계절을 보내고 한 계절을 맞이하는 일은 설렌다. 봄에는 첫 장을 새로 넘기기 전의 두근거림이 있다. 오늘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숲에서 만나는 생명들마다 인사하고 말 건네며 느릿느릿 걸었다. 그들이 내게 다가와 건네는 말을 받아 적었다. 봄에 따스한 일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가까운 봄날에 반짝이는 생명들과 눈을 맞추기를 기대한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무엇이 될까 하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