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걸은 길 위에서 나도 닳아질 것이다
먼지가 투명한 속내를 드러낸 허공 사이로 둥둥 떠가는 걸 구경하며 한량없이 게으름을 부려도 되는 휴일 아침이건만 나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아무 할 일도 없고 딱히 만날 만한 사람도 없고 조용히 나 혼자 지낼 만한 일을 하고 싶을 때는 산책을 한다. 혼자서 어딜 가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도 타지 않은 옆자리에 커피 한 잔을 놓고 플레이리스트를 고르고 차를 달려 숲으로 간다. 겨울에 태어난 나는 나의 내면과 마주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사람을 많이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웃고 말 하고 소통하는 일을 하지만 조용한 성격의 내가 가면을 쓰고 역할극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할 일 없이 자연 속에서 천천히 걷기, 산책은 나를 외로움에 처하게 한다. 외로움은 나를 치료한다.
구례 화엄사 구층암으로 가는 좁은 오솔길에는 조릿대 푸른 댓잎이 이리저리 몸을 부대끼며 서걱대는 바람이 가득했다. 대나무가 자라지 않은 서늘한 빈터에 차나무는 이름 없는 잡초처럼 제멋대로 자라나 있다. 찻잎을 우려낸 주전자를 기울여 조르륵 따르는듯한 바람 소리가 키 작은 관목들의 물기 없는 나뭇잎 사이로 지나다녔다. 화엄사 오는 길에 보았던 고랑을 따라 가지런하게 자라는 차나무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아니지, 가지치기를 하지 않고 나무가 자라고 싶은 대로 내버려둔다면 저런 모습인거지. 틀에 맞추어서 네모나게 가지런하게 줄 맞추어 끝 간 데를 모르고 펼쳐진 차나무들이 도열한 차밭을 지나온 나는 좁다란 오솔길에서 왠지 모를 시원함을 느꼈다. 귓전을 스치는 바람과 계곡을 휘돌아 내리는 여울물 소리가 청량했다.
그렇게 십 여분이나 걸어갔을까. 수풀이 무성히 자란 뒤쪽에 작은 사찰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층암은 암자라기보다는 법당이 있는 사찰의 형식을 갖춘 곳이었다. 작은 뜰에 커다란 불두화들이 만발했다. 물을 잔뜩 머금은 하얀 꽃송이에 연두 한 방울이 퍼져나간 듯 상큼한 불두화는 소박한 꽃이다. 커다랗고 하얀 불두화 사이에서 연분홍 참꽃이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다. 천불전의 부처님들을 마주하고 삼배를 올린다. 불두화처럼 둥글고 뽀글뽀글한 머리모양을 한 귀여운 부처님들은 입 꼬리를 살짝 올리고 나를 내려다본다. 천분의 관객 앞에서 나는 정성을 다해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한다. 소박하고 순한 관객들이 지켜보는 불단 아래에서 두 무릎을 가슴에 당겨 몸을 둥글게 말고 나는 조용히 있다. 나는 조금은 외롭다.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외로운 나의 감정은 사치스럽다. 세상으로부터 너무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거리의 공간에서 나는 외로운 채로 조금 더 머무르고 싶다. 참꽃 속으로 깊숙이 머리를 들이밀고 꿀을 빠는 호박벌의 분주한 날개 짓 소리가 산사의 정적을 깨고 있다.
얼룩덜룩한 군복 색 모과나무가 있는 법당 층계를 몇 칸 밟고 내려왔다. 오른 쪽 요사 채에서 승복을 입은 사람들이 문을 열고 나와 툇마루에 앉아서 신을 찾아 신고 뒤란으로 들어간다. 스님들을 따라 나온 보살님과 눈이 마주쳤다. 합장하고 허리 굽혀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차 한 잔 드시고 가세요.”
“아, 그래도 되나요, 감사합니다.”
스님이나 보살님과 아는 사이도 아니고 따로 연락을 드린 것도 아닌데, 처음 온 곳에서 처음 본 사람의 환대를 받고 보니 송구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한 번 합장을 하고 높은 툇마루에 올라서기 위해 기둥을 붙잡았다. 오랜 세월에 부드럽고 매끈해졌지만 울퉁불퉁한 목질이 그대로 느껴졌다.
“응? 이게 왜 이래요? 기둥이 울퉁불퉁해요.”
“모과나무인데 다듬지 않고 그대로 기둥으로 썼어요.”
집을 짓기 위해 매끈하게 가공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질감 그대로 쓴 모과나무는 살아 있을 때와는 반대로 뿌리 부분이 지붕의 공포를 떠받치고 있었다. 땅 속에 묻혀 있었던 거대한 뿌리가 단련된 근육처럼 안정감 있게 지붕을 이고 있다. 기둥이 된 두 그루의 모과나무는 오솔길에서 만난 차나무처럼 야생의 모습 그대로 옹이와 가지 흔적을 간직한 채 절 집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암자 지붕의 기왓골에는 잡초도 자라고 있다. 조릿대가 사람 키 높이만큼 자란 오솔길과 수풀이 무성한 곳을 지나면 만나는 구층암은 숨은 그림 찾기처럼 자연 속에 그대로 스며들어 있다.
보살님을 따라 방안으로 들어갔다. 정갈한 다기와 차 도구들이 차려진 상 앞으로 안내받고 바닥에 앉았다. 방을 빙 둘러 차를 보관한 항아리와 다기들이 둥글둥글했다. 보살님은 죽로야생차라고 부르는 차를 내 잔에 채워주셨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대전에서 왔어요.”
“먼 곳에서 오셨네요. 차를 좋아하시나요?”
“차는 좋아하지는 않는데 오는 길에 야생 차나무를 보고 차 맛이 어떨지 궁금해졌어요. 사실 저는 차보다 커피를 좋아해요. 늦은 오후에는 잠을 못 잘까봐 현미녹차 티백을 우려먹어요.”
“저는 차를 안 마신 날에는 머리가 맑지 않은데 선생님이 차 맛을 알게 되시면 좋겠네요.”
보살님이 따라주시는 죽로야생차는 내가 먹던 현미녹차와는 다른 맛이었다. 볶은 현미에서 나는 구수한 맛도 나지 않았고 쓴 녹차 맛도 나지 않았다. 나는 혀끝의 차 맛에 골똘해졌다. 보살님이 두 번째 우린 차를 따랐다. 이번엔 혀가 아니라 입천장의 어두운 방안에 희미한 전등이 켜지는듯한 환한 맛이 느껴졌다. 보살님은 차는 첫물 우릴 때보다 두 번째 우린 물이 맛있다고 했다. 보살님과 차 이야기를 나누며 죽로야생차를 배가 부르도록 마셨다.
지리산에서 맛본 옅은 차 맛을 다시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시 야생차를 마신다면 ‘아, 이 맛이었지.’ 하며 향과 맛을 떠올릴 것도 같다. 자연스럽게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차나무와 구층암 가는 길의 시원한 여울 소리와 법당 앞의 소담스러웠던 불두화를 생각한다. 차실 툇마루를 지키는 근육질 모과나무 기둥과 옅은 미소와 슴슴한 차를 내려주시던 보살님을 다시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깎아내거나 다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시간에 마모되었던 나무의 시간을 기억한다. 시간이 지나면 내가 지나온 길 위에서 나도 닳아질 것이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언제든 외로울 준비가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