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엄마, 보고 싶은 아버지

by 부엉이숲


아버지의 아버지는 빨갱이였다. 과거에 빨갱이라는 말은 입에도 올리기 무서운 말이었다. 지금도 정치인이나 특정인을 종북 좌파로 몰아 공격할 때 쓰이는 살아있는 말이다. 이 글에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도 긴장되지만 언젠가 부모님 이야기를 쓰게 된다면 이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철이 들어 세상을 알게 되었던 20대일 때 아버지가 우리 사남매에게 자주 했던 말씀이 ‘밖에 나가서 집안이야기 하지마라’와 ‘여기저기 기웃대지 말고 빨리 집에 와라’였다. 집회와 시위에 관한 자유가 제한되어 있었던 80년대에 대학가에서는 늘 데모가 있었다.

학교에서 광주사진전을 처음으로 보고 손발이 벌벌 떨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일어서지 못했다. 오빠는 83학번이었고 나는 85학번 새내기일 때였다. 연일 민주시위가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집에 들어올 때까지 동구 밖까지 나와 서성거렸다. 아버지가 독재정권에 인권을 유린당하고 엄혹한 감시와 억압을 받아왔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몸을 사려야 했다. 교내에서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고 행진을 하다가도 교문 밖으로 진출할 때면 나는 비겁하게도 슬그머니 샛길로 빠져나와 누구에게서 도망치는지도 모르는 혼란을 겪으며 멀고먼 길을 돌아 수정골로 숨어들었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요즘 이슈는 무엇인지 넌지시 묻고 일찍 들어오라는 말을 잊지 않으셨다. 아버지와 함께 사회면을 읽고 분노하고 슬퍼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가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랐다.

지금은 돌아가신 부모님은 36년생 동갑내기 쥐띠셨다. 두 분은 친척 분의 소개로 만나 결혼하셨다. 동갑내기 부부는 사이가 좋다는데 나의 부모님은 사이가 좋지 않으셨다. 술만 마시면 동네 안길이 떠들썩하도록 ‘홍도야 우지마라’를 외치고 들어오는 아버지와 가난한 살림살이에 친척 할머니 두 분까지 모셔야 했던 엄마는 아버지의 슬픈 과거가 딸려 나오는 술주정을 싫어하셨다. 엄마의 잔소리를 들은 척 만 척 아버지는 양철 지붕 집 대청마루에 두 팔을 벌리고 누워서 ‘오빠아가 이이따아’를 외치고 잠이 드셨다. 그토록 지난 밤 호기롭게 정체모를 홍도를 달래려고 애썼던 아버지는 다음 날 엄마의 끝없이 이어지는 잔소리에 한 마디도 못하고 돌아누워 술병을 앓았다.
아버지는 술을 안 드신 날에도 건강이 좋지 않았다. 부모님이 집안 내력을 우리에게도 잘 알려주지 않았지만 언니가 귀띔 해 준 바에 의하면 젊은 아버지는 중앙정보부에 수시로 끌려갔었다고 했다. 북에서 부모 형제가 내려왔느냐는 취조를 당하고 심지어 고문까지 당하고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져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는 이야기를 성인이 되어 듣고선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매일 술 드시고 늦게 들어와 집안을 시끌시끌하게 해서 어린 우리들을 불안에 떨게 했던 아버지에게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하던 날 아버지는 김치짠지 한 종지와 소주병을 앞에 두고 텔레비전 앞에서 울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아버지, 어머니가 가엾게 여겨지지만 그때는 화목하지 못한 부모님이 원망스러웠고, 가난한 집이 싫었다. 내가 부모의 처지가 되어 보니 세상에는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모질게도 잔소리를 퍼부어대던 엄마는 아버지가 고문을 당하고 후유증으로 앓아 누웠을 때 아버지를 낫게 할 약을 구해다 먹이고, 몸에 좋은 보양식을 해먹이셨다. 어렸을 적에 엄마가 아버지를 미워만 하는 줄 알고 나는 몹시 불안했다. 아버지가 복숭아 경매한 돈을 보증으로 다 떼이고 술 드시고 늦게 들어와 ‘홍도야 우지 마라아’를 외치던 날 엄마는 댓돌에 놓인 신발을 신고 뒤란의 어둠속으로 걸어갔다. 아버지는 애먼 홍도는 달래려고 무진 애를 쓰면서 불쌍한 엄마에겐 따뜻한 남편이 되어 주지 못하는 건지 원망스러웠다. 그 밤 나는 엄마가 도망가는 줄 알고 댓돌에 놓인 쓰레빠를 아무렇게나 꿰어 신고 뒤란을 지나 복숭아밭으로 가면서 엄마~ 엄마아~를 캄캄한 허공에다가 대고 외쳤다. 장마의 한 가운데에서 복숭아밭은 푹 젖은 공기로 묵직했다. 밭 가운데 있는 산소를 지날 때 나는 무서워서 차라리 마구 뛰어 달렸다. 우리 밭이 끝나가도록 엄마는 기척이 없었다. 오씨 아저씨네 포도밭 가장자리의 우물가에 다다라 나는 자꾸 안 좋은 생각이 났다. 학교 선생님이 육성회비를 안낸 아이들을 불러 세워 부모님께 이야기하라고 한 말을 엄마에게 전해서 엄마가 더 슬퍼한 것 아닐까 하고 후회했다. 우물가에서 엄마 엄마를 부르다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아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부엌 연탄불 위의 냄비에다가 무언가를 끓이고 있었다. 북엇국이었다.

건강도 좋지 못한 아버지는 지독한 골초인데다 술에 의지했다. 남북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하면 아버지는 작은방에서 혼자 텔레비전을 보면서 술을 드셨다. 북에 있다는 형제자매를 찾으려고 편지도 접수하고 했지만 소식도 답장도 받지 못하셨고 아버지의 눈은 오랫동안 충혈 되어 있었다. 엄마는 생활력이 없는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북엇국을 끓이고 아버지한테 좋은 보약이며 민간요법으로 만들었다는 괴상적은 알약들을 지어다가 드렸다. 엄마는 아버지가 바로 지척에 앉아있는데도 나에게 종종 ‘니 아버지, 저녁 드시라고 해라’ 하고 말 심부름을 시켰다. 나는 두 분이 이렇게 미워할 바엔 차라리 이혼하시라고 했다. 엄마는 당장 이혼할 듯이 하다가도 다음날이면 아버지에게 좋다는 약을 찾아 다녔다. 엄마의 강하고 억척스러운 성격으로 우리집은 양계장도 하고 과수원도 하면서 사남매를 교육시키고 성장시켰다. 아버지는 그런 강한 아내에겐 냉정하고 남들에게 보증도 서주고 돈을 꿔주고 떼이고 하면서 끊임없이 엄마를 실망시켰다.

한국사의 어둡고 슬픈 시절을 온몸으로 지나온 두 분은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가슴에 숨기고 어떻게든 가정을 지키고 아이들을 키우셨다. 두 사람이 지닌 아픔과 상처는 서로를 찌르는 가시가 되어 더 큰 고통을 만들어내면서도 자식들의 교육과 양육에 정성을 쏟으셨다. 나는 불쌍한 아버지와 불쌍한 엄마 두 분 사이를 오가며 말 심부름도 하고 위로도 사랑도 드렸지만 부모님이 살아왔을 험난했던 그 시간은 너무도 아득하고 멀어서 이해하기도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부모님의 삶에서 기쁘고 행복했던 시간을 찾아보며 두 분을 추모한다. 아버지 어머니, 편히 쉬시고 그곳에서도 부부싸움 하시는지, 중간에 말 심부름은 누굴 시키는지 궁금합니다. 엄마, 아버지 두 분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가 걸은 길 위에서 나도 닳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