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병들고 둥지는 비었어도

by 부엉이숲


새해가 되면 나는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은근히 온기를 기대한다. 암담한 계절이지만 새해라는 말은 신선하다. 벌써 겨울은 절반이나 지나갔고 아직 깜깜한 밤이지만 새벽의 미명을 상상 할 만큼의 낙천과 희망을 나는 꼭 쥐고 있다. 밤사이 내린 눈이, 물기 하나 없이 사위어 버린 빈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만나 따가운 눈보라를 만들고 있다. 혹독한 한기를 몰고 오는 바람에 계절성 우울증에 걸린 듯 바깥에 나가는 것을 며칠째 미루고 있다.

1월의 한가운데 들어 이제 두터운 외투와 털장갑, 목도리와 모자는 일상의 필수품이 되었다. 집을 나와서 무거운 눈발을 어깨에 인 채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있는 침엽수들이 있는 숲으로 간다. 머플러로 꽁꽁 싸맨 목이 자꾸 움츠러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일단 아침 햇볕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숲의 오솔길이 보이기 시작하면 발걸음이 빨라지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얼음분수를 곳곳에 틀어놓아 겨울 왕국처럼 변한 공원 풍경을 즐기는 사람들을 지나 숲속으로 나는 더 깊이 들어간다. 리기다소나무들이 빽빽한 숲을 지난다. 굳건하고 거센 침엽수 사이로 들어온 정오의 햇볕은 리기다소나무에게 따스한 곁불을 쪼여준다. 줄기 중간에 아이 주먹만 한 딱따구리 구멍은 입구가 막혀가고 있다. 새끼 새가 나간 지 오래 지나면 나무가 생장하여 그렇게 된다. 숲을 지나는 동안 곁불을 나누어 받은 덕분으로 내게도 기분 좋은 온기가 찾아온다. 머플러를 조금 느슨하게 고쳐 매고 산등성이 길로 올라간다.


임도 길을 걷다가 숲의 북쪽 경사면을 바라보았다. 구불구불 이어진 등성이 너머의 계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음각이 깊게 패인 계곡의 그늘진 곳에는 잎이 진 활엽수들의 빈 가지가 하얗게 늘어서 있고, 도드라진 경사면에는 소나무 같은 침엽수의 초록빛이 햇볕을 받아 대조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산마루 등걸은 마치 다림질이 잘 된 주름치마처럼 정갈하다. 아까부터 가도 가도 넓은 임도길이 나오는 게 이상하다. 이 길로 계속 가면 금산 방향이고 나는 길을 잘 못 가고 있었다.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가려니 너무 멀다. 산비탈 아래로 사람들이 낸 쪽 길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선다. 겨울 정오의 햇볕은 뼈만 드러낸 나뭇가지들 사이로 깊이 들어와 마치 이쪽으로 가면 안전하다는 듯이 앞을 밝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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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나는 성공만을 생각하며 달리다가 길을 잘못 들었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산의 능선도 깊숙이 살펴보면 나무는 병들고 둥지는 이미 아무도 찾지 않는다. 내 삶의 그 지점에서 성공의 예감이 나를 앞으로 나가게 했고 그곳만 바라보게 했었다. 삶은 때때로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비극이다. 무릎 쓰고 올라간 정상에서 이곳이 내가 원한 목표가 아님을 깨달았다. 길을 잘 못 들면 방향을 바꾸면 된다는 당연한 방법 앞에서 후회하지 않을까 오래 생각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 올린 성과가 헛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헛된 일을 반복하는 사이 마음은 텅비어갔다. 오래 걸려도 무릎 쓰지 말고 두발로 천천히 걷는 일을 하자. 숲도 보고 나무도 보고 새소리도 듣자. 내가 행복한 일을 해야 좋은 거지. 남들이 말하는 성공을 내려놓자 마음이 편해졌지만 몸이 아픈 걸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산책로까지 내려왔다. 길을 잘 찾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벚나무가 늘어선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벚나무 사이로 늘어진 가느다란 관목 가지 끝이 노랗게 보이는 것이 이상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세상에 어떡하지, 2월도 아니고 1월 겨울의 한 복판에 길마가지 꽃이 피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지만 반사적으로 코부터 가까이 대본다. 향이 없다. 한겨울에 피었다가 그만 얼어 죽은 것이다. 길마가지 나무는 어쩌자고 이렇게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일까. 남들보다 이른 성과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울 때 그것을 잡는 것, 그것이 성공이라고 착각한 거다. 실패해도 괜찮다. 꽃을 피우려 애썼던 그 시간이 아까워도 다음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기회가 있으리라.


매번 길을 잃고 삶이 부질없고 가혹한 시련은 나에게만 찾아오는 것 같지만 겨울이 있어야 봄이 온다. 나무는 병들고 둥지는 비었고, 애써 만든 꽃눈은 살을 에는 혹독한 겨울 칼바람 앞에서 얇은 한 꺼풀 비늘에 의지한 채 겨울을 견딘다. 자세히 들여다 본 겨울 숲은 위태로워 보였지만 멀리서 본 산 등성이의 커다란 물결은 위대했다. 나는 자주 그 경험을 잊고 삶이 나에게만 가혹하다고 푸념한다. 그러나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보면 가슴 벅찬 기쁨에 감격할 것이다. 삶은 매번 일희일비하지만 앞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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