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첫번 째 진리
우리 모두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지구.
이 아름다운 행성에는 수많은 이름이 있지만, 그중 가장 잔인한 이름은 아마도 고통의 바다일 것입니다.
저는 한때 극심한 불안 증세와 우울증을 겪었습니다. 차에 타기만 하면 사고가 날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고, 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그 생각을 도저히 버틸 수 없어, 하루 종일 아무 목적 없이 걸어 다니기도 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공포와 두려움을 불러왔고, 생각은 다시 그 감정들을 키워냈습니다. 마음의 병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몸을 서서히 갉아먹다 어느 순간 마음에 잠식된 몸 전체를 병들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불안과 우울은 밥을 먹어도 소화시키지 못하게 했고, 자도 자도 피곤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루 종일 몽롱한 상태로 아무 의욕도 생기지 않았고, 천근만근 몸을 움직이는 일 자체가 고역이었습니다.
그런 저를 지켜보며 할머니의 마음은 타들어 갔을 것입니다.
“살아갈 날이 새털같이 많은데, 우짜면 좋겠노.”
죽음
이 세상에서 죽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요. 죽음의 해답은 오직 죽은 자만이 알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철학을 통해 이 침묵의 대상에 다가가려 한 시도입니다.
케이건은 말합니다.
죽음은 고통스러운 경험이 아니라고. 죽은 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중립적인 사건은 아닙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분명히 나쁩니다.
그 이유는 죽음 이후의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살아 있었다면 누릴 수 있었을 수많은 내일, 관계, 기회와 가능성을 한순간에 끊어버립니다. 죽음의 해악은 고통이 아니라 결손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른 죽음이 더 비극적으로 다가옵니다.
살아갈 시간이 많을수록, 잃는 것도 많기 때문입니다.
케이건은 사후 세계나 영혼의 불멸로 죽음을 위로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삶은 더 선명해집니다. 시간은 가볍지 않고, 하루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는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이 허무의 근거가 아니라, 우리가 이 순간을 함부로 살 수 없다는 이유가 된다고 결론짓습니다.
그러나 철학으로 죽음을 이해하려는 시도 역시, 우리가 바라는 완전한 해답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찾은 최초의 인물은 우리가 흔히 아는 붓다입니다. 붓다 역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2600년 전 인도의 카필라성에서 태자로 살아가던 고타마 싯다르타는 성 밖의 세계를 알지 못한 채 보호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네 차례에 걸쳐 성문 밖으로 나서게 됩니다.
동쪽 문에서 그는 노인을 보았습니다. 굽은 허리와 떨리는 손, 세월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디는 모습 앞에서 싯다르타는 처음으로 ‘늙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마주합니다.
남쪽 문에서는 병든 이를 보았습니다. 고통에 잠긴 육신은 부와 권력, 젊음이 결코 인간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서쪽 문에서 그는 마침내 시신을 보았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몸, 식어버린 생명 앞에서 싯다르타는 죽음이 예외 없는 결말임을 깨닫습니다.
늙음과 병, 그리고 죽음.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이 세 가지 고통 앞에서 그는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삶이 결국 고통으로 향하는 길이라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은 그가 평생 외면해 왔던 두려움이었고, 동시에 반드시 답해야 할 숙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북쪽 문에서 그는 전혀 다른 존재를 마주합니다. 세속을 떠나 수행하는 사문이었습니다. 소유도 지위도 없이 걸음을 옮기는 그 얼굴에는 이상하리만치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싯다르타는 그 순간 깨닫습니다. 고통을 피하는 삶이 아니라, 고통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길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날 이후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질문만이 남았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늙음과 병,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훗날 그를 궁궐 밖으로 이끌었고, 고행과 수행을 거쳐 마침내 붓다의 길로 나아가게 한 최초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죽음은 사상이나 철학, 종교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현대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비약적으로 늘어났지만, 이는 곧 늙고 병든 상태로 고통받는 시간이 함께 늘어났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의 상속자가 아니라, 자기 팔자의 상속자입니다. 지구상에는 약 80억 명의 사람이 살아가고 있고, 그만큼 서로 다른 팔자를 지니고 있습니다. 얼굴이 모두 다르듯 삶의 조건 역시 모두 다릅니다. 위계가 엄격한 한국 사회에서는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조차 형과 동생으로 나뉘며 전혀 다른 팔자를 부여받습니다.
설령 성공을 통해 팔자를 고친다 해도, 마지막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죽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유일하게 고쳐야 할 팔자가 있다면, 그것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일 것입니다.
붓다의 깨달음은 우리 같은 범부에게는 감히 닿을 수 없는 경지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에 대한 우리의 환상 때문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생각 자체가, 오히려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됩니다.
괴로움은 나에게 오지 않습니다.
괴로움은 나를 위해 옵니다. 괴로운 사람만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붓다는 사성제를 설하며, 가장 먼저 괴로움 그 자체를 진리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괴로움은 어쩌면 선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겠다고 마음을 내는 그 순간, 이미 우리는 깨달음에 한 걸음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初發心時便正覺
초발심시변정각
처음 깨달음을 얻고자 마음을 낸 바로 그 순간이
곧 깨달음을 이룬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