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훈의 시간
1월 2일 어제는 올겨울 들어 가장 추웠던 날이었습니다. 거실 온도는 3.8도.
저희 집은 유적지 인근에 자리한 오래된 고택으로, 아직도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저의 단군이신 할머니는 터를 잘못 잡으셨습니다.
2025년에도 기름 보일러를 사용하는 저희 집은 보일러를 마음껏 틀었다가는 곧바로 기름값 폭탄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겨울마다 패딩과 두꺼운 이불, 전기장판에 의지해 연명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을 바쳤지만, 끝내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대로 먹고 살만하긴 하지만 솔직히 좀 지긋지긋하긴 합니다.
저는 따로 수행처를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매 순간이 알아차림이 일어나고 매 끼니가 공양 시간입니다.
1990년 3월 12일 저녁 7시 23분, 부산직할시 초량 성분도병원에서 하얀 망아지 한 마리가 태어났습니다. 예정일보다 한 달이나 빨리 세상에 나왔습니다.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태생부터 참을성이 없었습니다. 체중 2.65kg, 계체는 겨우 통과했습니다.
이름은 성훈(成訓) ‘바른 길로 가르쳐 이루게 한다’라는 뜻으로 작은 고모가 지어주셨습니다.
태어남부터 저는 할머니의 걱정거리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약하다, 약하다”라는 말을 하도 들어서인지, 세뇌라도 된 것처럼 정말 약하게 자랐습니다
어릴 적 저희 집은 대문 옆에 변소가 있는 푸세식이었고, 세면장은 마당에 따로 있었습니다. 겨울에 샤워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변소는 수세식으로 바뀌었고, 또 한참 뒤에야 욕실과 화장실이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한때는 세가족이 옹기종기 저희 집에서 가난한 살림을 이어나갔습니다. 안채는 방과 방 사이에 벽을 대서 객식구에게 세를 내어주고 사랑채에도 항상 다른 가족이 들어와 함께 살았습니다. 당시에는 저희 집 다섯 식구 외에도 온갖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지금은 카페로 리모델링 된 주택에는 민희와 대훈이 가족이 살았습니다.
이웃들은 가족처럼 살갑게 지냈습니다.
옆집 소녀는 새끼손가락 옆에 작고 귀여운 손가락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그것이 이상해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특별하게 보였습니다.
시간은 다시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마당의 세면장에서 형과 함께 양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마 부엌에 있었을 겁니다. 그날따라 다리가 유난히 아파 솥단지 위에 잠시 앉았는데, 그만 개뜰뱅이가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저는 펄펄 끓는 솥 안으로 그대로 떨어졌습니다.
형은 울면서 엄마를 부르며 고함을 쳤고, 저는 너무 큰 충격에 정신의 끈을 놓아버렸습니다. 발버둥이라도 쳤다면 화마가 온몸을 훑고 지나갔을지도 모릅니다. 인내심의 부족이 대참사를 불러왔고, 역설적으로 그 인내심의 부족이 저를 살렸습니다.
어린 성훈이는 머리를 박박 밀고 동자승이 되었습니다.
저의 출가와 고행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망각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 프리드리히 니체
제 어린 도반 역시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어른들의 욕심과 광기 속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어린 영혼들이 다치고, 또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수소 풍선의 피해자였습니다. 풍선은 보통 헬륨으로 채우지만, 푼돈에 눈이 먼 누군가가 수소를 넣었나 봅니다. 풍선이 터지는 순간 불꽃이 일었고, 그 아이의 얼굴에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았습니다. 저는 그를 위해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퇴원 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형과 저는 어린 시절 할머니 방에서 함께 잤습니다. 어떤 처방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던 할머니는 “열기 식히는 데는 알로에가 좋다”는 말을 어디선가 듣고 오셨는지, 밤마다 제 등을 알로에로 덮어주셨습니다. 알로에와 할머니의 눈물로 제 등은 늘 축축했습니다. 열기는 이미 한참 전에 식었는데도 말입니다.
망각은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입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인간은 결국 고통 속에서 미쳐버릴 테니까요. 저는 너무 또렷한 기억을 조금은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술을 찾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의 아픈 기억을 맨정신으로 온전히 견뎌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유년기를 지나며 사고 당시의 장면들은 다른 기억들로 조금씩 대체되며 희미해져 갔습니다. 그러나 집에는 마땅한 샤워 시설이 없었기에 일주일에 한 번씩은 목욕탕에 가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목욕탕과 수영장은 저에게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어른들은 딱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고, 어떤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마치 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침팬지 새끼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괴로운 기억이 다시 갱신되어 제 안에 쌓여갑니다.
목욕을 마치고 탈의실로 나오면 아버지는 재빨리 제 등을 수건으로 가려주며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저를 숨겨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쏟아지는 화살을 대신 맞아주는 방패였고, 목욕탕이라는 험난한 세계 속에서 저를 지켜주던 유일한 메시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