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의 원인
해가 거듭될수록 생일이 주는 감흥은 옅어집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생일은 1년 중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었습니다. 생일이 되면 장난감 로봇을 받을 수 있었고, 피자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는 선배와 후배, 동기들과 함께 생일 주간 내내 술자리를 이어가곤 했습니다. 생일은 축하받을 명분이 되었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좋은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생일은 다르게 다가옵니다.
생일은 다른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태어남’을 기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1년 중 가장 슬픈 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탄생은 어머니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겼습니다. 그리고 태어남은 필연적으로 수많은 고통을 함께 데려옵니다. 태어났기에 우리는 늙고, 병들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태어났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이 있고,
태어났기에 미워하는 사람과 마주해야 하며,
태어났기에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해 괴로워하고,
태어났기에 ‘나’라는 존재가 생겨났고, 부정할 수 없는 실체처럼 느껴지는 몸과 마음을 지닌 채 모든 괴로운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모든 괴로움의 근원,
‘태어남’과 ‘나 있음’
왼쪽 사진의 저는 2015년 3월 14일의 제 모습입니다. 머지않아 깊은 우울 속으로 빠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생일이라며 좋다고 웃고 있습니다. 그 웃는 얼굴이 왠지 모르게 짠합니다. 오른쪽은 2025년 2월 22일의 제 모습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피부 세포는 약 4주를 주기로 교체되고, 1년이 지나면 몸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세포가 바뀐다고 합니다. 겉보기에는 연속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10년 전의 내 몸과 지금의 내 몸은 사실상 완전히 다른 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유사성을 동일성으로 착각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또한 전혀 다른 상태임에도, 같은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살아갑니다. 지렁이가 꿈틀거리며 기어가듯, 우리 모두는 아주 천천히 늙어가고 있지만, 이 사실을 망각하기에 늙음은 더욱 큰 괴로움이 됩니다.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먹고 마셔야 합니다. 끊임없이 산소를 들이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뱉는 과정을 통해서만 이 몸은 유지됩니다. 산소가 부족해지면 3분 만에 뇌 손상이 시작되고, 8분이 지나면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릅니다.
산소 없이 7분도 버티지 못하는 이 존재를 과연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 관점에서 보면 나는 몸이 아니라, 어쩌면 산소의 흐름에 더 가깝습니다.
미용실에서 잘려 나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나의 머리카락을 볼 때는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습니다. 그러나 군 입대를 앞두고 머리를 짧게 자르는 어떤 청년은 눈물을 흘릴지도 모릅니다. 출가하여 부처님께 귀의하기로 발심한 행자는 머리를 미는 동안에도 세속에 대한 미련으로 번뇌가 요동칠 수 있습니다.
똑같이 머리를 자르는 행위임에도 감정은 이렇게 다릅니다. 그 차이는 머리카락을 ‘내 몸’이라고 여기느냐, 아니냐에서 비롯됩니다.
시간을 훨씬 더 많이 거슬러 가보겠습니다. 왼쪽 아이의 몸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다른 것으로 변하고 흩어지고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내 몸을 나라고 여기는 이유 중 가장 강력한 것이 감각이며 모든 감각 중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을 불러 오는 것이 통증일 것입니다.
통증은 언제나 몸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통증은 몸 그 자체라기보다, 몸에 대한 해석에 가깝습니다.
같은 통증이라도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운동을 마친 뒤 찾아오는 근육통은 고통이라기보다 성취에 가깝습니다. 몸이 성장하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병원 침대 위에서 느끼는 통증은 공포가 됩니다.
출산의 고통을 떠올려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출산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극심한 통증 중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많은 이들은 그 고통을 견뎌냅니다. 그 통증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통증의 강도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통증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통증은 몸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는 관점이 붙여진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몸은 단지 신호를 보낼 뿐입니다. 아프다는 신호, 긴장하라는 신호, 멈추라는 신호. 그 신호를 고통으로 만들거나, 의미로 바꾸는 것은 결국 해석하는 주체입니다.
그래서 통증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같은 상처도 누군가에게는 견딜 만한 불편이고, 누군가에게는 삶을 무너뜨리는 고통이 됩니다. 통증의 크기는 상처의 깊이가 아니라, 그 상처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가 통증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아픔 그 자체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통증이 나를 해치고, 나를 망가뜨리고, 나의 삶을 위협할 것이라는 해석이 먼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통증은 몸보다 항상 생각을 먼저 찌릅니다.
결정적으로 내 몸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저는 네 살 때 예기치 못한 사고로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저의 등과 엉덩이는 화상으로 덮혀있고 허벅지는 손상된 흉터를 메우는데 사용됐습니다.
그 사고는 어린 시절의 저와 가족에게 닥친 최악의 비극이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할머니의 미처 청산되지 못한 업보였으며, 제게 인생은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30년 가까운 시간을 고통 속에서 살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