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 앞의 잣나무

사진 속 나무는 잣나무가 아닙니다

by 무명

어느 날 제자가 묻습니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조주가 답합니다.


“뜰 앞의 잣나무다.”


이 질문에 대한 저만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




지금이야 법륜스님이나 꽃스님 같은

스타(?) 승려들이 여럿 존재하지만,

고려 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회에서 마이너한 자리를 차지해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욕심과 집착을 버리라고 가르치는 종교가

기득권의 중심에 오래 머무를 리 없습니다.


불교의 인기가

다른 종교에 비해 낮은 이유가

스님들의 획일화된 헤어스타일이나

패션 때문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재밌을리가 없습니다.

도파민 넘치는 미디어와 콘텐츠가 넘치는 세상에

사람들이 따분한 글과 말을 오랜 시간 동안 가만히

읽거나 듣고 있을리가 없습니다.


현대인들 중 대부분이

단 일 분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ADHD 환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은 시도 때도 없이 화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스마트폰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기 위해

눈에 보이는 표상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기독교에서는 이를

‘우상’이라고 부릅니다.


불교라는 이름 또한 하나의 ‘상(相)’이며,

결국 내려놓아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보살’이라는 이름조차 버려야 합니다.


금강경 제21분 비설소설분을 비롯한 여러 대목에서 이와 유사한 논리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보살과 관련해 이를 요약하면 다음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보살이라 하는 것은 곧 보살이 아니요,

그 이름이 보살일 뿐이다.”

(卽非菩薩 是名菩薩)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보살은‘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자’라는 고정된 이미지입니다.


즉비보살.

보살이라는 고정된 실체,

곧 상(相)에 집착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참된 보살이 아니다.


“나는 보살이다.”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

이런 마음이 남아 있다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아직 벗겨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시명보살.

모든 집착과 상을 비워냈을 때,비로소 이름뿐인 보살로서 대자대비를 행할 수 있게 됩니다.


갈 길이 멀기 때문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한 편, 한 편이 지루해지길 원하지 않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뜰 앞의 잣나무’를

저만의 방식으로 남겨봅니다.





뜰 앞의 잣나무


지구는 태양을 공전하고 있고,

우리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에너지는

태양으로부터 흘러옵니다.


태양은 낮을 만들고,

나무를 자라게 하며,

태양광과 태양열이 되어 전기를 만들어냅니다.

바닷물을 증발시켜 구름을 만들고,

바람을 일으키며,

비를 내려 생명을 이어가게 합니다.

우리는 태양빛을 통해

비타민 D를 얻고,

시간과 계절의 흐름을 배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외 없이 모두

태양신 아폴론의 아들과 딸입니다.


태양은

모든 것을 주고도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주면서도 잃지 않고,

비추면서도 소유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태양은

한없이 자애롭습니다.


우리의 몸은

지구 안에 존재하는 원소들의 결합입니다.

탄소와 산소, 칼슘과 철,

흙과 물과 공기의 기억으로

우리는 만들어졌습니다.


자애로운 어머니 대지 가이아는

우리의 몸을 만들었고,

우리는 죽음과 함께

다시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갑니다.

바다도, 산도, 들도, 하늘도

모두 어머니의 품입니다.

어머니는

한없이 자비롭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지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어머니의 몸 위에 선을 긋고,

경계를 만들고,

어머니의 유산을 서로 차지하려 다투며

어머니를 파괴해왔습니다.


어머니의 계좌는

점점 말라가고 있습니다.

늙어가는 어머니의 체온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얼어붙어 있어야 할 강인한 마음은

서서히 녹아내립니다.

그 눈물이 바다가 되어 흘러가며

어머니의 땅은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자식은 계속 태어나고,

자식들 사이의 재산 분쟁은

날이 갈수록 더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따금 회초리를 듭니다.

쓰나미를 일으키고,

화산을 폭발시키며,

가뭄을 가져오고,

홍수를 불러옵니다.


어머니의 분노는

파괴가 아니라 경고이며,

벌이 아니라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그 회초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귀 기울이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지다가


’생각하는 나‘를 ‘보고있는 나’를 자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로 완전히 돌아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