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뽕 철학

니체와 쇼펜하우어

by 무명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는 짬뽕입니다. 저는 세상사가 짬뽕 같다고 생각합니다.

시원하고 칼칼한 해물짬뽕이 있는가 하면, 돼지고기가 들어가 국물이 걸쭉하고 깊은 짬뽕도 있습니다. 차돌박이를 비롯한 온갖 해물이 듬뿍 들어간 짬뽕이 있는가 하면, 국물 없이 자작하게 볶아낸 야끼우동도 있습니다. 백짬뽕도 있고, 굴짬뽕도 있으며, 짬뽕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중식 우동 역시 빠질 수 없습니다. 옆 나라의 나가사키 짬뽕 또한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룹니다.


같은 이름을 달고 있지만, 무엇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내는 음식. 어쩌면 짬뽕은 이 세상에서 가장 다양한 얼굴을 가진 음식이 아닐까 합니다


모두 다 각자의 매력이 있는데, 이것만이 최고라고 우겨대니 세상이 짬뽕처럼 뒤섞여 버리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참으로 웃기는 짬뽕입니다.


술을 많이 마시는 제가 좋아하는 음식은 역시 짬뽕입니다. 지독한 숙취를 달래는 데 이만한 것이 없고, 해산물이 푸짐하게 들어간 짬뽕은 술안주로도 제격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어렵게 느끼기에, 긴장을 풀고자 짬뽕 이야기와 사진을 먼저 꺼내봅니다. 철학은 ‘애지혜(愛智慧)’, 말 그대로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너무나 혼란스러워 보입니다. 이것과 저것, 온갖 것들이 뒤섞여 혼돈 그 자체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진리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질수록,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 묘한 질서가 감지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저는 진리를 짬뽕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완전한 균형, 조화. 나름대로 진리에 대해 설명해보고자 하지만, 이것 역시 진리 그 자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철학은 생각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이지만, 생각 자체가 이미 진리에 역행하는 행위이기에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평생을 바쳐온 분들께는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불립문자(不立文字). 진리는 생각과 말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을 통해 진리에 근접하는 데 성공한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유는 물과 기름처럼 끝내 섞이지 못했고, 완전히 극과 극을 이루었습니다. 스승과 제자이기도 했으며,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인물들. 니체와 쇼펜하우어입니다.

극단은 진리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게 만들어버립니다. 두 사람도 서로의 의견을 어느 정도 수용했다면 참 좋았을텐데 말입니다. 짬뽕처럼요.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같은 지점에서 출발했지만, 정반대의 방향으로 걸어간 사상가들입니다. 두 사람 모두 세계의 이면에 이성이 아닌 어떤 근원적 힘이 존재한다고 보았고, 인간은 그것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을 대하는 태도에서 둘의 철학은 갈라집니다.


쇼펜하우어에게 세계는 ‘의지와 표상’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표상에 불과하며, 그 이면에는 목적도 이성도 없는 맹목적인 의지가 흐릅니다. 이 의지는 끊임없이 욕망하고,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않습니다.


욕망이 좌절되면 고통이 되고, 충족되면 권태로 바뀌어 다시 새로운 욕망을 낳습니다. 이 순환 속에서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비관으로 향하게 됩니다.


행복은 적극적으로 얻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잠시 고통이 사라진 소극적인 순간일 뿐입니다. 그가 제시하는 길은 의지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약화시키고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예술, 특히 음악은 잠시 의지를 멈추게 하고, 연민은 타인의 고통을 통해 자아의 경계를 허물어버립니다. 나아가 금욕과 집착의 포기는 의지로부터 부분적인 해방을 가능하게 합니다. 쇼펜하우어에게 구원은 삶을 더 강하게 사는 데 있지 않고, 삶의 요구를 덜어내는 데 있습니다.


니체는 이 스승의 진단을 누구보다 깊이 받아들였지만, 처방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니체 역시 세계를 지배하는 근원적 힘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부정해야 할 의지가 아니라, 삶 그 자체의 에너지로 보았습니다. 니체에게 문제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고통은 제거해야 할 오류가 아니라, 삶이 강해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요소입니다. 쇼펜하우어가 의지에서 벗어나려 했다면, 니체는 의지를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그는 이를 ‘권력 의지’라 부르며, 모든 생명은 스스로를 확장하고 극복하려는 충동을 지닌다고 보았습니다.


이 차이는 삶에 대한 평가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쇼펜하우어가 삶을 견뎌야 할 것으로 본다면, 니체는 삶을 긍정해야 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심지어 동일한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다시 살겠다고 말할 수 있는 태도, 즉 ‘영원회귀’를 긍정하는 자세가 니체가 말하는 강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쇼펜하우어의 이상이 욕망을 끊는 성자라면, 니체의 이상은 고통과 혼돈까지 끌어안고 자기 삶의 의미를 창조하는 초인입니다.


결국 두 철학의 차이는 세계를 바라보는 용기의 방향에 있다. 쇼펜하우어는 세계의 잔혹함을 너무 정확히 보았기에 한 걸음 물러섰고, 니체는 같은 잔혹함을 보면서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한 사람은 고통을 줄이려 했고, 다른 한 사람은 고통을 통해 더 큰 삶을 말하려 했습니다. 같은 의지에서 출발했지만, 한쪽은 부정으로, 다른 한쪽은 긍정으로 철학을 완성합니다.


니체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많은 이들은 1889년 토리노 사건을 진짜 ‘죽음’으로 봅니다. 그는 토리노 거리에서 채찍질당하던 말을 끌어안고 오열한 이후로 완전히 정신이 붕괴가 되었으며 더 이상 철학적 글쓰기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 이후의 니체는 사유하는 니체가 아닌, 생물학적으로만 살아 있는 니체였습니다. 그는 말년 11년을 거의 의식 없는 상태로 보냈고, 어머니와 여동생 엘리자베트의 간병 속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니체의 비극적인 죽음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철학때문입니다.


정신 붕괴의 원인은 아직도 논쟁적입니다. 매독설이 과거에 유력했으나 현재는 회의적입니다. 이 외에도 유전적 뇌 질환, 만성 편두통과 신경계 질환, 극단적 고독과 과로로 추정되지만 확정된 진단은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은 정확하게 고타마 싯다르타와 같은 의문을 품었고 고통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념했으나 완전히 다른 결말에 다다릅니다. 쇼펜하우어는 해탈하지 못했고 니체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을 믿은 것과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죽을 때까지 자아가 남아있었고 니체는 자의식이 과잉으로 자아를 상실했습니다. 반면 붓다는 자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출가 직후 이미 완성된 선정 수행자들을 찾아갑니다. 알라라 깔라마의 가르침은 무소유처(無所有處)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미세한 선정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고타마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스승과 동등한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알라라는 공동 지도자가 되자고 제안했지만 고타마는 이렇게 판단합니다. “이 법은 지혜로 인도하지 않고,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로 이끌지 않는다.”


그는 존경을 표하고 떠나가고 웃다카 라마풋타를 만나게 됩니다. 웃다카 라마풋타의 가르침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님도 아닌, 당시 인도 수행의 최고 경지였고 싯다르타는 이 역시 완전히 체득했습니다. 놀라운 경지에 스승으로부터 공동 계승을 제안받았지만 결론은 같습니다.


“이 선정은 고요하지만, 생·노·병·사의 문제를 끝내지는 못한다.”


그는 다시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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