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직 일기
새벽 3시, 남편이 깨어있었다. "여보 잠이 안 와? 어제 일찍 자서 그런가 보네." 이틀 전, 직장 동료와 거나하게 술을 마셨다. 그간 회사에서의 분투를 소상하게 나누며 한 잔 두 잔 기울이던 술잔이 새벽 1시가 되어서야 끝났고, 그 여파로 어제는 일찍 잠이 든 터였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남편이 선 잠을 잘 수밖에 없는 이유를. 회사에서 팀장인 그는 요즘 꽤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듯했다. 상대적으로 젊은 팀장이라는 이유로 조직에서는 그에게 두 팀의 업무를 함께 맡겨둔 상태였다. 게다가 책임감은 어찌 그리 강한지, 팀원들의 마음 상태까지 살펴가며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회사에서 그런 팀장을 만나본적이 없는 것 같은데;) 몸은 축 났을 테고, 머리는 아팠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지쳤을 것이다.
그와 나는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회사를 현재 휴직 중이다. 회사 돌아가는 형국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남편은 나에게 회사 얘기를 잘하지 않는다. 말해봐야 좋은 얘기가 별로 없고, 무엇보다도 내가 건강을 위해 쉬고 있으니, 스트레스를 주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그의 배려를 나는 안다. 그래도 가끔은 서운하기도 하다. '나보다 여보를 잘 이해할 사람이 있어?' 농담처럼 반기를 들어보지만, 그에게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그가, 오늘 퇴근 후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단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상황이 이상하다고 했다.
두 팀의 일을 맡고 있으니, 앞으로 있을 조직개편 때 한 팀의 일을 떨구는 게 목표였다. 둘 다 애정 어리게 책임감을 갖고 임했지만 현실적으로 무리인 상황이었다. 하여 그 한 팀의 일을 어느 팀으로 넘기면 좋을지, 혹은 자신을 대신할 팀장으로 누가 적합할지, 새로운 팀이 생긴다면 어떤 팀원들로 구성하면 좋을지, 그는 최근 꽤 오랫동안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위에서도 그 방안을 고민해달라고 했단다. 그런데, 자신이 모르는 새, 누군가가 그 팀의 팀장으로 앉을 생각으로 팀원까지 꾸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는 거다. 평소 출세 욕망이 가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한 때 회사 규율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직원이 주인공이었다. 연차가 쌓여 남편이 팀장이 되기 전 친분이 있었지만 본색을 드러내며 뒤통수를 치는 터에 거리를 두고 있는 그 사람이었다.
회사에서 집으로 오는 5분, 그는 상황을 짧게 설명했다. 천불이 일었다. 화가 났지만 화를 낼 수 없었다. 내가 그의 마음속 불을 키울 필요는 없었다. 그는 오죽했을까.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방법이 틀렸다. 올곧고 원칙적인 그에게 이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하필 그 사람이라니. 두 번째 뒤통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보태지 않았다. 그의 속은 얼마나 타 들어가고 있을까.
새벽 3시, 침대에 앉아있다가 거실로 나온 그를 따라나섰다. 안마를 해주겠다며 여기저기를 주물러줬다. 스트레스만큼이나 뻣뻣하게 굳은 그의 어깨와 목에 속이 상했다. "여보, 일 안 해도 된다. 알고 있지?" 매번, 꽤 자주 하는 말을, 그 시간에 한번 더 했다. 진심이었다. 나는 남편이 행복하길 바란다. 순간순간 스트레스받지 않고 기꺼이 즐거운 상황이길 바란다. 가장이라는 부담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도 내려놓았으면 한다. 우리는 그간 꽤 열심히 회사를 다녔고, 돈을 벌었으며, 나름 풍족하게 살고 있다. 지금 당장 일을 그만두더라도, 그간 벌어둔 돈을 쓰면서 살면 되고, 돈이 떨어지면, 그때 뭐라도 하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다시 한번 말했다. "여보, 힘들면 오늘 사표 내도 나는 괜찮다."(이건 진짜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 모아둔 비상금 좀 꽤 돼."(이건 거짓이다)
남편은 알겠다고, 자신도 안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회사가 1년 중 단 하루, 그간의 운영실적을 평가받는 날이다. 남편은 잠을 설쳤음에도, 말끔하게 차려입고, 다시 문을 나섰다. 그는 또 평가시간에 똑 부러지게 대답하고 나올 것이다. 문제만 없으면 되는데 너무 실력이 탁월한 것도 문제다. 그냥 좀 대충 하지. 오늘 저녁 시간, 그는 오늘 평가 때 일을 알려줄지 모르겠다.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었을까. 오늘부터라도 비상금을 조금이라도 더 모아야겠다.